세상의 끝, 달로.
어느 날, 나는 그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곳을 거쳐간다고 했었지만, 내가 이리도 빨리 너를 쫓아가고 싶게 되었을지는 몰랐지. 노트 한 권을 챙겨 오길 잘했어, 걸어 나가면서 이 노트에 적어나가면서 내 길을 기록해야지.
자, 그걸 무어라 칭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곳을 'TO THE MOON'이라고 불렀다. 무작정 달로 떠났으니까. 달로 향하기 위해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지나 바다로,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갔으니까. 처음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알았다. 내 생각대로 장면이 바뀌기도 하는 것이… 아, 이곳은 나의 꿈속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곳은 죽음으로, 달로 가는 곳이었다. 보름달은 죽음의 종착지였으며, 죽음으로 나아가는 이 꿈을 꾸는 것은, TO THE MOON으로 오는 사람은 대게 이승에 깊은 미련이 남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곳에서는 빠르게 네 개의 계절을 지나고 계절이 없는 종착지에 도착하는데 그곳이 바로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에게 이승에 대한 미련을 떼기 위해 계절을 하나씩 보낼 때마다 '이승에 대한 미련이 담긴 기억'을 잃어나간다. 개개인의 꿈의 공간으로 종착지로 가는 길이 아닌 이 길들은 보통 나 외에 나처럼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마주할 수 없다고 했다. 홀로 쓸쓸히 이 길로 발을 떼면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록하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으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은 필연이었고, 내가 가야 할 길이었으니. 죽음에는 순서도 없었고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언제든 죽음에 닿을 수 있었음을. 나는 무엇이 그렇게 미련이 남았을까. 누구를 그렇게 잊지 못했을까. 나는 왜 너를 두고 떠나야만 했을까.
달로 향하는 첫 번째 길로 '늦겨울의 하현(LAST QUARTER)'이었다. 사람도 외계인도 아닌, 제 일에 치여서 사는 어떤 사람 같은 생물들이 사는 도시. 도시라고 하기엔 숲이 우거진 마을에 가까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이 도시의 이름인 'LAST QUARTER'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고, 들어서자마자 생물들이 사는 주택가가 드러난다. 그들은 유독 화가 나고 바빠 보였지만, 그들과 어렵지 않게 대화를 시도할 수는 있었다. 그들은 이곳이 달로 가는 출발지라고 했고, 길은 쭉 직진으로만 나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쭉 직진으로 나있는 길을 그저 나아가다니, 어쩐지 조금 단조로운 느낌도 들었다. 나처럼 왜 내가 달로 가고 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의문을 가졌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달로 향한다고 말해주더라. 나처럼 혼자 오는 사람이 아닌, 달로 향하는 사람이 늘 함께 가는 동행자를 데려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네가 나보다 먼저 죽지 않았다면, 나는 네가 내 동행자였을까? 아니면, 네가 죽을 때 나는 네게 이런 길을 걸어 나갈 때 동행자가 되어주긴 했을까…. 속이 먹먹해졌다.
그들과 대화를 한 후 조금 걸어가고 나니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공원을 걷고 걷다 보니 그 끝에는 광장이 보였다. 공원에 광장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발걸음을 막 떼려고 할 찰나에 참으로 이질적이게 밀실이 보였다. … 내가 달로 향하게 되기 직전의 모습을 구현시켜 놓은 것 같았다. 나는 밀실에서 자살 시도를 하고, 이곳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어쩐지 혼자 오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네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긴 싫으니까. 애써 그것을 외면한 채 홀로 걷고, 또 걸었다. 너와 함께 이런 길을 걸어 본 적 있었던가? 오래된 일이라 흐려져 잘 떠오르지 않는다. 네가 세상을 떠날 때 이 길을 함께 걸었다면 아마 병실의 모습이었을까. 너는 오래 병원에 누워있어 깨어나지 못하다 세상을 떠났으니까. 괜히 울컥, 눈물이 올라오는 것 같아 눈가를 벅벅 닦으며 걸어 나갔다. 아, 내 죽기 전 마지막 미련은 너였구나. 너를 위해 죽었지만 너를 위해 죽지 못했구나. 문득 깨닫으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었다. 제 갈 길을 아는 자는 제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네 마지막 순간엔 부디 내가 이 길을 함께 걸었기를. 네 마지막 미련이 나였기를, 내가 너를 외롭게 하지 않았기를.
다음으로 나온 것은 한 분수대였다. 신기하게도 마침내 주머니에는 동전이 딱 하나 들어있었다. 동전을 분수대에 집어던지고 소원을 빌라는 거겠지. 내 소원은 말이야…, 동전을 던지고 양손을 모으고. 살포시 눈을 감았다. 내가 너를 만나러 갈 테니, 우리 죽어서 오래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기를.
소원을 빌고 걸어 나가니 마을의 끝에 닿아있는 것 같았다. 참 허무하리만큼 볼 것이 없는 곳이었구나, 늦겨울은. 원래 지나가는 것은, 마지막이라는 것은 그렇다고 했던가. 무언가가 끝나는 것은 그런 것이지. 늦겨울이 지나가면 새로이 시작되는 봄이 온다. 어쩌면 이곳은 내 생을 정리하고 생각하며 걸어갈 수 있었던 곳이고, 봄은 내가 달로 가는 것을 진짜로 시작할 수 있는 곳이리라. 그리 생각했다.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위한 나룻배가 눈에 들어왔다. 저 배를 타고 다시 나아가면 되는구나, 싶어 가까이 다가갔지만 나룻배 위에는 가득 관이 하나 타고 있어서 저 관을 내려둬야 내가 탈 공간이 생길 것 같았다. 꽤나 무거워 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동행자가 있는 경우라면 들기 조금 수월했을까.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고 씨름하고 엎어지고, 한참을 거기서 시간을 쏟다가 겨우 관을 배 밖으로 치워내자 나룻배 안에 보이는 것은 작은 상자 하나와 물망초였다. 내 미련, 내가 너를 어찌 잊고 싶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잊어야 한다. 이곳은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물망초와 상자를 챙겨 들고 조심스레 배에 올랐다. 내가 배에 오르자마자 마치 내가 갈 곳이 어디인지 안다는 듯 배는 달이 있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투명한 다섯 개의 구슬이 박혀 있었으며 곱게 접힌 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쪽지를 펼쳐보면 타자기로 작성해 적힌 것처럼 또박또박, [당신의 미련을 하나씩 이곳에 담아주세요.]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 그래. 나는 정말로 이곳에서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게 맞는구나. 기쁘면서도 슬펐다.
나만을 태운 고독한 배가 달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자, 문득 네게 서운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두고 먼저 식사를 했던 일, 큰일이 생겼을 때 내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던 일, 내가 몰랐던 네 모습을 뒤늦게 알았을 때, 네가 아팠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네가 죽은 후에서야 알게 됐을 때…. 그래, 그땐 그것들이 참으로 서운했었단 말이야. 그리고 또……. 나는 더 이상 서운한 일들을 떠올릴 수 없었다. 서운한 일들이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떠올렸던 것들도 점차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내 미련은 너였기에, 너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이구나. 상자 속 투명한 구슬들 중 제일 왼쪽에 있는 구슬이 물들어나갔다. 푸른빛으로 물든 구슬, 저것은 내 '서운한 일에 대한 미련'이구나.
그렇게 서운함 하나 남기지 않고 늦겨울이 지나갔다. 봄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달은 어느새 하현달에서 그믐달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나룻배는 또다시 육지에, 새로운 도시에 맞닿았다. 누구 하나 기다리고 있지 않은, 도시의 이름만 달랑 걸려있는, '봄의 그믐(DARK MOON)'이었다.
달은 그믐이 되어 아까보다 어두운 빛을 내는 것 같았고, 그만큼 이곳의 모습도 무거워 보였다. 이곳에 사는 생물은 다름 아닌… 걸어 다니는 해골이었다. 그들도 앞에서 봤던 녀석들처럼 바빠 보였으나 다른 특징이 있었다. 전부 까만 양복을 입고 있다는 것. 또 머리에는 하얀 리본을 달고 있기도 했다. 주변에 피어있는 꽃들은 전부 흰색의 국화였으며, 이곳은 마치… 장례식장 같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곳은 순식간에 장례식장이 되어 있었다. 밀폐된 공간이 갑자기 펼쳐지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오, 어서 와.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따로 부조금은 내지 않아도 되니까. 들어가서 식사라도 하고 가. 고인한테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겠다. 혼자 온다더니, 정말이었구나."
걸어 다니는 해골 한 녀석이 내게 다가와서 그리 말했다.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짧은 짐작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아, 여기는 내 장례식장일지도 몰라.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너는 올 수 없는 장례식장. 네가 내 죽음을 기억해줬으면 했는데, 내가 네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 꼴이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얌전히 해골이 차려주는 식탁만 바라봤다. 음식들은 생각 이상으로, 장례식장에 어울리지 않는 메뉴들이었다. 여러 디저트, 탄산음료, 차… 파스타면 파스타, 피자면 피자… 없는 메뉴가 없어 보일 정도였지만.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보이지 않는 나물, 과일… 메뉴들은 생전 내가 좋아하던 음식이었다는 것을. 이제 짐작이 아닌 확신이겠지, 여긴 내 장례식장이야.
"아, 그리고 이건… 유품인데, 이걸 굳이 네게 줘도 될지 모르겠어."
식사를 마칠 때쯤, 해골은 내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내 미련이 담긴 유품이 담겨있었다. 너와 찍었던 사진, 네게 선물 받은 지갑, 네가 처음으로 성공했던 종이로 접은 토끼. 그리고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런 쪽지는 넣어둔 적이 없는데 뭘까?
[ 나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너를 두고 혼자 떠날 수 없었기에,
죽음으로 가야 하는 운명 앞에서 너를 잊는다고 고했다.
P.S 있잖아, 너는 내 어둠에 내린 소중한 달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 끝에서 달을 쫓아 너를 추억하고, 너를 잊을게. ]
쪽지의 내용은 밝지 못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네가 죽었음에도, 나는 너와의 추억에 미련을 가지고, 너를 잊지 못해서, 너를 잊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어서. 네가 살아있었다면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으며, 이 쪽지를 마주하게 되었겠지. 이 모든 길이, 여기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나 혼자 보게 되어서 다행이구나. 참 다행이야. 내 미련이 너여서, 쉽게 눈을 감지 못한다는 걸 네가 알면 네 속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또 만약 네가 이 길을 걸었다면, 이 길을 걸어가면서 나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면 네 마음도 얼마나 찢어졌을까. 부디 네 끝에 미련은 내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생각을 고쳤다.
그 쪽지를 보고 네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주변의 모습이 금세 바뀌었다. 해골은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고 앞에는 또 나아갈 수 있는 나룻배와 강의 모습만 눈에 들어올 뿐.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망하게 상자를 들고 있는 나 하나뿐이었다. 하늘에 뜬 달은 이제 그믐도 아닌 것이 모습을 거의 감춰가는데, 나는 저 달을 찾아서 정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나아가야 할까.
두렵다. 죽음이 두렵다기보다는, 내 미련인 너를 잊는다는 사실이 가장 두렵다. 그럼에도 나는 나아가겠지. 덜컥, 다시 돌아가고 싶어 뒤를 돌아보면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까맣게 물들어 꼭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서.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그렇게 도망치듯 나는 또 달이 있는 곳으로 발을 뻗는다.
달빛이 흐려져도 나룻배는 내가 갈 길을 안내해 주듯 잘 나아갔다. 그래, 너라도 있어 다행이구나. 나 혼자 길을 헤매지 않아서 다행이야. 자, 그럼 이제 또 하나 잊어야 할 시간이 아닐까. 나는 구슬이 박혀 있던 작은 상자를 열었다. 이번엔 무슨 색일까, 그런 사소한 생각을 하면서.
어김없이 잊기 위해 네 생각을 한다. 태풍이 내리던 날, 공항에 나갔던 너를 기다리며 불안에 떨었던 모습.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네 표정을 바라보던 모습, 화가 잔뜩 나서 나를 쏘아보던 네 얼굴에서 읽었던 이별의 순간, 네가 아팠던 날들… 이번엔 왼쪽에서 두 번째, 작은 구슬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색의 이름은 불안이었다. 나는 너와 있으면서 불안했던 기억들을 추억함과 동시에 잊었음을. 이제 남은 것은 또 뭘까. 고요한 강을 바라봤다. 점차 바다의 향이 나는 것 같은 넓은 강 위로 뚝, 뚝 떨어져 퍼지는 것은 비인가, 내 눈물인가. 알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불안도 버린 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마저 뜨겁게 느껴졌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올라왔다. 그렇게 '여름의 삭(THE NEW MOON)'에 발을 내린다.
이제 삭월이 되어 달의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하늘에 떠있었고, 그것을 보고 이곳까지 나아왔으니 분명 저쯤 어디에 떠있을 거야. 그런 추측만 할 수 있었을 뿐이었지. 이곳에 와서는 사람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친구와, 가족과, 사랑하는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마치 여름밤바다에 놀러 온 것 같은 배경이었다. 달이 보이지 않아 마냥 어두울 줄 알았건만 환하게 꾸며진 여름의 밤은 달빛을 모두 훔쳐 가져다 놓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밝고 아름다웠으니까. 야시장도 있었고, 모래사장도 있었다. 어쩐지 네가 사줬던 오징어 버터구이가 생각나서 하나 사 먹으면서 모래사장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혼자 이 밤을 걸어서 무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갑자기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와 나는 달이 없는 하늘로 고개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위이잉, 그것이 솟아오르던 그 소리. 펑, 퍼벙, 펑. 아름답게 빛을 뽐내며 터지는 그 소리.
언제였더라, 네가 살던 해수욕장 근처에서는 늘 여름마다 폭죽을 터트리거나 행사를 하는 경우가 잦았었지. 너는 늘 시끄럽다면서 꿍얼거렸지만 늘 나랑 그것들을 바라보며 걷는 걸 참 좋아했었잖아. 어디로 발을 들여도 결국 네 기억이 나는 것이 내 미련이 너인 것을 이 글을 읽어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것 같았다.
'나 없이도 좀 뭔갈 해내고 해 봐.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나 없는 시간엔 어떻게 지내려고 그래?'
장난스레 네가 내뱉었던 말에 웃음을 흘렸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줄곧 시간이 남을 때마다 내 옆에 있어주고 함께 추억을 쌓아나갔으니까. 우리 참 많은 것을 같이 눈에 담고, 이야기하고, 듣고, 남겼구나. 터져나가는 불꽃이 꺼질 때쯤 나는 네 생각을 덮고 해안공원으로 향했다. 바다가 보이는 해안공원에는 절벽 주변에 만들어진 외로이 서있는 등대 하나가 놓여 있고, 주변엔 놀이터로 꾸며져 있었다. 등대는 이제 사용하지 않는지 제 기능은 하지 못하고 전망대가 되어 있었다. 분명히 이 도시에 발을 들일 땐 여름밤 축제 같은 화려한 분위기에 엄청 밝다고 생각했는데,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한없이 어둡고 깜깜하기만 했다. 내 세상에, 내 밤에 달처럼 떠올라 빛을 내주던 네가 사라졌을 때처럼. 그런 어둠을 담고 있었다. 어쩐지 입안이 씁쓸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라면 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도, 이 길을 걷게 된다면 가게 될까? 나는… 나는 갈 거야. 이 길의 끝에, 네가 있다고 믿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길은 이 길뿐이니까. 네게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게, '죽음' 뿐이었다. 하아, 짧게 울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뜨거운 여름 공기가 나를 감싸도 몸은 여전히 춥게 느껴졌고, 나는 울음 탓인지 추위 탓인지 모를 이유로 몸을 떨어댔다.
한참을 전망대 아래로 보이는 어둠을 내려보다가 조금 쉬어가기 위해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망자들을 들이는 호텔이었나, 들어가자마자 아무런 이유 없이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는 카드 키 하나를 쥐여줬다. 적힌 번호에 맞춰 방을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갔고, 어느 호텔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방 안 침대 너머로 보이는 유리로 된 문. 그곳에는 작은 테라스가 꾸려져 있었다. 그곳으로 보이는 밖의 풍경이, 여전히 어둡기 그지없다. 욕조에 몸을 뉘었다가 또 욕실에만 들어가면 꼭 하나씩 빼먹고 들어가 나를 찾던 너를 떠올렸다. 가끔 귀찮아서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이젠 익숙해져서 네가 뭘 놓고 들어갈지 미리 챙겨두고 맞추는 센스까지 발휘했던 기억도 있다. 씻으러 들어갈 때 네가 빼먹은 것은 없나 살펴보고 미리 챙겨서 쥐여주기도 하고. 문 앞에 미리 가져다 두기도 했지.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며 가만히 다시 그 어둠을 바라봤다. 머리가 조금 말랐을 땐 테라스로 나가 놓여 있는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처음엔 너도 나도 담배를 피웠었는데, 먼저 금연에 성공하고 나서는 늘 나에게 잔소리를 했었지.
'아무리 그래도 베란다에선 피지 말라니까. 어차피 집 안으로 냄새 다 들어온다니까 그러네.'
그땐 그리도 듣기 싫어하며 외투를 껴입고 집 밖으로 나가던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 말도 간절히 듣고 싶을 정도네. 한숨 쉬듯이 담배연기를 뿜어내고, 불을 끄고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아, 얼마 만에 누워보더라. 달로 향하면서 한 번도 이렇게 쉰 적이 없었구나. 네 생각만 가득하기 바빴네. 네가 내 미련이라서, 이 길에서 너를 잊겠다고 말해놓고. 또 네 생각, 또 네 생각뿐이었구나 하는 말. 네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밖은 여전히 어둠이 내려있지만 아마 아침이겠거니, 싶었다. 태양이 뜨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방 문을 열고 보니, 아침 식사가 트레이에 담겨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막 구운 빵과 수프였다. 맞아, 아침으로 먹기 참 좋은 메뉴였었지. 내가 빵을 구우면 너는 수프를, 내가 수프를 요리하고 있으면 너는 빵을 구웠었잖아. 우리의 아침도 나름 죽이 잘 맞았었는데. 너와 함께 보냈던 여러 아침들을 떠올리며 빵과 수프를 가지고 들어와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자, 이제 다시 나아가야지.
그리운 너를 잊고 다시 쫓아 세상의 끝, 달로.
호텔 밖으로 나오니 여전한 바다향이 코를 찔러댔다. 어제는 분명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에 달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해서일까. 이 도시에 빛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에 발을 들인 사람들의 작은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다시 이 길 위엔 나 홀로 남았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여전한 나룻배였다. 다음 도시로 나를 안내할 나룻배. 너를 쫓기 위해 나아가는 길이건만, 어쩐지 나룻배에 오르기 겁이 났다. 걸어오면서 꾸준히 너와 나눈 추억을 떠올리고 있지만 잊혀버린 추억들은? 이 배에 오르면 또 너와 함께 했던 순간들의 일부를 잊을 텐데.
……그렇다고 내게 돌아갈 길이 있을 리가 없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겨우 배 위에 올라타 차오르는 달을 바라봤다. 곧, 초승달이 차오르겠구나. 시린 초승달을 바라보며, 다시 작은 상자를 꺼내어 열어본다. 아, 이번엔 세 번째 구슬이 서서히 노란빛으로 채워졌다. 노란빛의 구슬의 이름은, 즐거움이었다. 툭, 툭. 다시 또 구슬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이 글에 써두었던 너와 보낸 즐거웠던 일, 이제 나는 이 글을 다시 읽어나가도 너와 함께 했던 즐거웠던 기억도, 추억도 머리로 그려볼 수 없다. 이제 나는, 즐거웠던 날의 너를 떠올릴 수가 없어. 시린 초승달 아래에서 구슬이 담긴 작은 상자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울음은 다음 도시에 닿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도시에 닿자 고개를 들어 천천히 그곳을 바라봤다. 내가 이곳이 어디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번쩍거리는 전광판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CRESENTO MOON. '가을의 초승(CRESENTO MOON)'이었다. 내가 그 도시에 발을 들이자 검은 페도라를 쓴 자가 나타나 내 손에 자유이용권을 채워주고는 사라졌다. 굳이 더 살펴볼 것도 없이, 이곳은 놀이공원이었다. 즐거울 수 있는 곳,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곳. 아무리 이곳에서 머물러도 나는 너와 함께 갔을지도 모를 놀이공원에서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는데. 이제 남은 거라곤 너를 간절히 사랑하며, 네가 없음을 슬퍼했었고, 그것 때문에 분노했던 기억밖에 없구나. 화려하게 아름다운 놀이공원 앞에서 네 장례식 당일이 떠올라 멍하게 놀이공원 한가운데 서서 또 눈물만 떨궈댔다. 아아, 아아아, 아, 아아. 그날의 통증은 내 온몸에 불을 지르는 것 같았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떠나간 너를 더더욱 떠올리게 했으며, 내 몸에 붙은 불을 더 타오르게 하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제 몸을 한껏 다른 색으로 물들여 제 자신을 불태우고 떨어져 나가는 낙엽들이 너를, 이 길을 걸어 나가는 나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하는구나. 너는 낙화(落花) 했다. 너는, 환하게 피어나 떨어졌고 나를 떠났다. 그리고 나도 이젠 활활 타올라 네 곁으로 가리. 천천히 주변을 눈에 담아도 그래, 당연스럽게도 전부 너 말곤 떠오르는 것이 없어.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목마는 마치 네가 떠난 후로 반복되는 내 삶 같았고, 유령의 집은 네가 없는 집 안에 홀로 남아 사람 같지 않게 사는 슬픈 우리의 집을 떠올리게 했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코스가 있는 롤러코스터는 네가 죽은 이후로 한없이 추락하는 내 인생 같았다. 그저 계속 그랬던 것처럼 조금만 더 울자고, 결국 그리 결론 내렸다. 초승달을 등지고 돌아가는 관람차에 발을 올려 나는 그곳에서 울고 또 울었다. 네 죽음을 슬퍼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전히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처럼 네가 없는 내 삶은 전부 타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되는 것 같았기에. 나는 아직 네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퍼할 시간이 필요했어. 나는 어쩌면 이 길을 걸어 너를 만나러 가고 있는 이 모든 순간에도, 네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너는 내게 네가 없어도 스스로 잘 챙기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은 미래의 내가 아닌 너의 마지막이었던 오늘을 전부 내게 주겠다고, 너의 마지막이었던 오늘만큼만 나를 사랑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네가 없는 내일을 내가 어떻게 웃으며 기다릴 수 있고, 너의 마지막 하루만을 어떻게 추억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너의 어제를 사랑했고, 너의 오늘도 사랑하며, 너의 내일마저 사랑하고 싶을 텐데.
관람차가 돌아 다시 땅에 닿을 때, 나는 눈가를 벅벅 닦으며 관람차에서 내렸다. 가야 하니까, 시리도록 찬 길을, 온몸을 태워가면서 걸어 나가며 너를 잊고, 다시 너를 쫓기 위해서 나는 가야만 했으니까. 세상의 끝으로, 네가 있는 곳으로. 달로.
관람차에서 내려오니 어느새 관람차 뒤로 이곳에서 나가는 출구가 보였다. 하얀 초승달은 어느새 제 형태를 잊은 채 상현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분명 또 나룻배가 있겠지. 상현으로, 겨울의 상현으로 나아가 보름이 찾아오면 분명히 이 길의 끝이 있을 터이니 나는 또 어떤 날의 너를 잊게 될까 생각하며 나룻배에 올라탔다.
나룻배에 올라타 다시 작은 상자를 열어 구슬이 물드는 것을 바라보자, 이번엔 붉은색이었다. 붉은색 구슬이 이름은 화, 슬픔이었다. 너는… 죽었던가? 어느새 놀이공원에서 내가 왜 그토록 울었는지 이유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허무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더 이상 눈물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다. 그저 멍하게 차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바라볼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었다. 어쩐지 속상하네. 이제 남은 것은 그저 너를 사랑한다는 기억… 아니지, 앞에서 잊은 색들의 감정을 내려놓고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나? 그저 감정만 남아버린 것은 아닐까.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어디 있어? 너랑 나는 어떤 시간들을 보냈더라. 우리 함께 보낸 날들이 있긴 했었던가?
멍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나는 드디어 마지막 도시, '겨울의 상현(WAXING MOON)'에 닿았음을.
도시에 발을 들이자 하얗게 내린 눈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상현달 아래로 작은 도서관이 하나 보였고, 그 외엔 그 어떤 작은 것의 형태도 볼 수 없었다. 이 마지막 도시를 지나가면 나는 달에 닿게 될 거야. 내게 남은 거라곤 사랑했다는 사실, 그 기억뿐이니 이곳을 지나 달로 가는 배에 마지막으로 오르면 나는 너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네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겠지. 그렇게 달로 향하면, 나는 너를 다시 추억하고 만날 수 있을까.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나. 그 어떤 추억도 없이 사랑만 남은 것은 사실,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아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사랑한다고? 아무런 추억도,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사랑은 무슨. 너는, …어떤 사람이었어?
이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이 노트에 써 내려가던 '너'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만 남게 되었다. 너는 무엇이기에, 어떤 사람이었기에 나에게 잊지 못할 미련이 되었고, 내가 죽음으로 가기 위해선 너를 잊어야만 했는가. 나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너를 잊으며 추억해야만 생에 미련을 뗄 수 있는가.
도서관 안에는 안내자가 있었다. 이곳은 달로 가는 마지막 도시, WAXING MOON. TO THE MOON으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지나간다고. 이 도서관은 마지막을 기록하고 읽어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의 유서가 담겨 있다고. 나는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을 바라보다가 내가 가져온 노트를 두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책장 한편에 빈자리를 바라보고 마지막 글을 써 내려간다. 이 도시를 지나면 나는… 정말로 죽는 건가. 사람의 미련이라는 것은 참으로 크게 와닿나 보다. 이런 곳들을 지나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안녕, 이젠 정말… 끝이구나. 작은 상자를 열어본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구슬이 까맣게 온전히 물들었고, 내가 그저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만 겨우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아, 맞다. 나 이제 죽는구나. 한 줌의 재가 되었구나.
아, 아아, 아아, 아아아. 온몸이 타들어가듯 고통스러운데 이유조차 모른 채 나는 이 노트를 덮어야만 한다. 그리고 정말 끝으로, 세상의 끝으로, 달로 가야지. 그게 내가 가야 할 길이고, 내가 선택하게 된 길이니까. 왜 이렇게 발걸음이 무거울까. 내가 이곳에 버리고 가는 미련은 무엇이었지? 나는… 누구를 이렇게 그리워하고 쫓아온 걸까. 나는 왜, 왜, 왜, 왜, 왜. 도대체 왜, 왜…. 더 이상 글을 써 내려갈 힘조차 나지 않는다. 기록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내가 쓴 글을 읽어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것에 속이 아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감정들이, 기억들이, 추억들이 전부 이 노트에 담겨있구나. 나는 미련이라 부르는 이 노트도 이곳에 남기고 죽음으로 나아가리라.
이 책처럼 보이는 노트는 나처럼 죽음으로 향하는, 혹은 그 죽음에 잠깐이나마 누군가의 도움을 빌려 동참할 수 있게 된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이 책을 이곳에 남겨두고 간다. 물론 나는 누군가와 함께 올 수 없었고, 이미 떠나간 사람을 쫓아가는 것이기에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이승에 남아있는 너에 대한 기억을 두고 떠나는 것이 이리도 슬플 일일까. 이제 나는… 네 이름도 떠올리지 못한다. 죽음으로 가서 너를 만나면 나는 너를 기억할 수 있을까?
죽음의 끝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죽음으로 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글은 죽음으로 향하는 누군가의 기록이자, 죽음으로 향하는 길의 안내서이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