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그걸 생각할 여유라도 있는 듯이, 나는 죽어서도 평생을 생각했다.
가끔 나는 살아가면서 내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 눈에 보일 때,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 전부 이해되기 시작하고 그들의 역할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때. 나는 이쯤에 있겠군, 판단하고 세상 굴러가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나는 내가 감히 성숙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평생 성숙할 수 없다는 존재인 것을 알고 있는가? 저항해도, 아무리 이겨내겠다고 소리쳐도 결국 사람이 이겨내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재해나 사고, 질병. 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죽음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죽음 앞에서 무력해진다. 누가 만든 죽음인가? 누가 우리에게 내리는 죽음인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도 여럿 있지만 진짜로 죽고 싶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는가? 우리는 왜 우리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지만 우리가 언제 죽을지는 판단할 수 없게 되는가? 지금부터 쓰는 이 글은 죽음의 무게에 관한 글이다.
처음에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유서를 써둔다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평소에 더 잘한다거나 같은 행동을 꾸준히 했다.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당장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삶, 누군가에게는 존경받으며 살아가는 삶. 나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죽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병에 걸리거나 나이가 들어서? 때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정말 정해진 운명이 존재하는가? 그래, 사주? 손금? 뭐 그런 것이 감히 내 미래를 알 수 있는 것들이 될 수 있는가? 그 말에 답하자면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말이다. 감히 인간이 미래를 점쳐보고 대비하는 것?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틀에서 벗어나거나 바꿀 순 없다. 큰 대가를 치른다면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신은 우리를 가지고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정해진 '사주'가 내가 만들어진 이유이며, 이곳에서의 내 역할이다.
우주를 초월해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 또한 누군가의 세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 큰 사고인데, 결국 뉴스에 달랑 한 줄 나올까 말까 한 일이 되고,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는 모습들. 그것이 슬프게 느껴진 적은 없는가? 그 사실이 가끔 두렵진 않았나?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사람이었다. 성숙해지는 사람은 죽는다고 했던가? 그 공포를 알아채고 내가 이것에 대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시작했을 때 이미 죽음의 그림자는 내 앞에 다가온 후였다. 물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누군가가 태어나면 누군가는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끝이, 그 죽음이 내게 당장 다가올 거라곤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 어두운 것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렇게 죽음을 언제든 맞이할 수 있게 준비했음에도, 나는 눈앞에 있는 죽음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죽으면 모든 것이 쉽게 끝난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웠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죽어도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하고 두렵게 만든다.
죽음 뒤에 다가오는 그 삶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죽고 난 후에 알게 되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사실이 나를 미치게 한다. 우리는 그저 작은 세포조차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는 미칠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움직였을까? 어떤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결국 사람은 언젠가 죽을 텐데,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살아왔을까?
죽음의 무게란, 무겁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볼 때 가벼울 수도 있다. 우리가 깊은 내면까지 들여다보면 어쩌면 우리가 식사를 하기 위해 도살하는 동물의 죽음마저도 슬픈 일이 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징그럽다고 죽이는 벌레의 죽음마저도 무거워질 수 있다. 어쩌면 죽음의 무게는 그래, 측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의 무게가 무슨 의미가 있나? 애초에 '죽음의 무게'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에는 무게가 없다. 무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무겁게 바라볼 때도, 가볍게 바라볼 때도 있다. 설령 죽음에 정말 무게가 있다고 해도 '인간은 감히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죽음의 끝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름다운 이별,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과 회상, 반성, 아니면 죽음에 대한 억울함… 뭐, 그런 것들이 남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 또한 명확히 답해줄 수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끝없이 도망쳐야 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어떤 것들을 사랑했는지 전부 잊을 정도로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내 육체는 현실에서 죽었을지 몰라도 나는 그 '죽음' 앞에서 끝나지 않을 어둠 속에 남겨져 홀로 평생을 도망친다. 미련스럽게도 나를 집어삼키러 오는 '죽음'에게서 말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죽음은 진정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모두 잊고 떠나는 일이다.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사람들도 존재하니 부디 살아달라는 진부한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죽음에 앞서서 조금만 더 신중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당신에게 마지막 도피가 죽음이라면, 어쩌면 죽음은 구원과도 같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도망칠 수 있지만 결국 당신의 도피가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무엇인지도 모를 끔찍한 것들에게 끝없이 쫓기고 또 쫓기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물론 누군가는 차라리 살아가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어차피 우리는 결국 모두 죽을 것이고, 죽음의 무게만큼이나 삶의 무게 또한 감히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을 해두고도 나는 어쩌면 가장 마음 편한 것이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차라리 끔찍한 것들에게 쫓겨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 현실의 그 끔찍한 것들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은 너무 끔찍해졌다. 명예와 권력에 미친 자들, 권위에 눈멀어 학대를 일삼는 자들, 혐오와 남을 헐뜯는 것이 일상이 된 그 모습들… 그래, 그것들을 떠올리면 평생을 두려움 하나에만 쫓기며 죽음 앞에 서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죽음으로 인한 도피가 가장 이상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종종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뭐 이 모든 것 또한 인간은 감히 판단할 수 없는 문제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그 끔찍한 소리를 피해 뛰고 또 뛰어가면서.
세상에는 태어나는 사람이 있듯이 죽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난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나도, 다른 사람들도 종종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감히 생각해보곤 한다. 결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것에 대해. 죽고 난 후에 귀신들의 세계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물론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지만 가끔 나는 죽음이 마침표가 아닌 쉼표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다음 문장을 절대 쓸 수 없는 마지막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