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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쫑 Jul 28. 2019

땡큐 포 존버

무엇하나 도전할 힘 없을때 그때를 생각한다.

현대해상에 입사했을 때 장기보험 계약관리부로 배치받았다. 장기보험(실손, 연금, 암 등)에 대해 장기적인 전략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부서였다. 입사 초반은 멘붕의 시기였다. 투자, 재무로 지원해서 뽑혔던 나에게 장기보험이란 정말 생소한 영역이었다. 보험에 대한 지식이 많아야 하는 부서였다. 보험회사에 입사했지만 보험은 하나도 몰랐던 나는 부서 배치를 받고 많이 당황해했다. 읽어야 하는 보험 약관과 지침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한 달 동안 부서 내에서 자체 교육을 했지만 소화하지 못한 내용이 대다수였다. 같이 같이 발령받은 동기도 마찬가지.  동기와 보험 공부하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거지 같은 인사부. 메신저로 신나게 욕을 하면서 하루를 마치곤 했다.


나의 사수였던 차장님을 동물에 비유하긴 뭐하지만(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이다. 무슨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러는게 아니다!) 나무늘보 같았다. '버티면 다 한다. 나가지만 말아다오.'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차장님은 쩔쩔매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것저것 무엇하나 화내는 법 없이 가르쳐주셨다. 두 번 세 번 물어보는 것도 선량한 나무늘보 같은 표정(주토피아를 생각하면 된다)을 하고는 화내는 법 없이 다 가르쳐줬다. 덕분에 힘겨웠던 신입사원 시절이 꾸역꾸역 이겨낼 수 있었다. 일 년 반 정도 지났을 때 보험지식이 부쩍 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장의 대답에 막힘없이 대답할 때, 보고서에 쓸 말이 많아질 때, 회의 중간에 할 말이 많아질 때, 차장님의 오 머리 좀 큰 거 같다 라는 말이 매우 기분 좋게 들렸다. 해방의 기분과 함께 살만해졌다는 안도감이 교차할 즈음 차장님과 나는 장기보험 시스템 전반을 개선하는 시그마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오 맙소사!


쉴 틈을 주지 않고 쫙쫙 물을 짜내는 곳. 회사는 그런 곳이었다. 시그마 프로젝트는 일 년 단위의 장기 프로젝트였다. 문제점 도출, 해결책 제시, 시행을 통한 성과 도출 등 쉬운 게 하나 없는 프로젝트였다. 야근이 뻔히 보이는 프로젝트. 숨이 막힐만한 프로젝트였다. 안 그래도 바쁜데, 이걸 왜 우리가? 놀라운 건 차장님이었다.  짜증에 한숨만 쉬는 나에게 "시간이 아깝다!"라고 다그치면서 본인의 일을 프로젝트에 바로 대입시켰다. 무엇을 바꿀지, 바꿀 수는 있는 건지, 난이도는 어떤지.


"차장님, 기존에 일도 많은데, 숨 막히지 않으세요?"

"거기에 마음 쓴다고 달라지는 일 하나 없잖니."


차장님과 같이 작성하는 보고서는 소위 말하는 '반려'를 무수히 많이 당했다. 유관부서에서, 기획실에서, 우리 상무님이.  반려될 때마다 보고서의 버전은 높아져만 갔다. 파워포인트에 깜빡이는 커서만 봐도 천불이 났다. 이 정도의 열정이면 깜빡 서울대도 갔을 텐데 깜빡 여기서 깜빡 모하는 건지 깜빡.  차장님은 반려를 대응하는 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바로 반박을 하기보다는 상대 의견을 듣고 자리에서 고민하고 직진이냐 재검토냐를 선택했다. 직진할때는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꼼꼼하게 반박자료를 준비했다. 그렇게 우리의 보고서는 62라는 숫자로 마무리되었다. 차장님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이 보고서는 사망이야'라고 지레 포기했을 것이다. 한 열번정도? 


 그때 차장님을 보면서 배운 것이 있다. 무엇이든 배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쉬이 한번에 이뤄지는 일은 없다는 것. 비판과 어쩔 수 없는 것들에 감정을 너무 쏟으면 성장할 수도 없다는 것. 에너지를 아껴서 오롯이 하나에 집중해야 성장의 시간이 더 빨리 온다는 것도. 항상 옆에서 보면서 '저 많은 일을 언제 다할까' 생각했는데 확실한 비결 하나는 알았다.  끈끈하게 버티는 것. 취할 충고들은 취하고, 스스로의 감정선에 빠지지 않고 묵묵하게 나아가는 것.


 장기 프로젝트를 끝낸 뒤 2년 후 대리로 승진할 때, 차장님이 제일 많이 기뻐했다. "버티길 잘했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던 그 순간은 마치 한 장의 사진을 마음속에 보관한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직할때 이 회사에서의 6년동안 장기부서의 근무 경력과 지식은 크나큰 메리트가 되었다.  얼마 전, 동생이 췌장에 악성 종양을 제거할 때 나의 보험회사 경력이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그 버팀의 시간들이 모여서 내가 되었다. 지금도 나를 아는 사람들이면 보험 관련 궁금증은 나에게 묻곤 한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성취'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이런 시간 후에 오는 게 아닐까?  귀한 열매는 수많은 거절과 막힘을 경험하고 넘으면서 아주 조금씩 나아가야 보이는게 아닐까?


요즘도 무엇하나 새로 시작하려면 두근거림과 함께 두려움도 느껴진다. 일이든 연애든 주식이든 시험이든.  얼마나 많은 상처와 거절이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아는 것도 있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면 분명 어딘가는 닿게 된다는 사실을. 여름을 놓쳐도, 가을이 온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잔잔한 호수에 발가락을 살포시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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