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창궐>, <명량>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무한하게 많은 선택을 하고 산다. 선택은 피곤한 일이다. 많은 에너지가 들고 스트레스도 받는다. 선택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기도 하지만, 선택을 해서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하는 것도 선택이다. 만약 <창궐>을 볼지 고민 중이라면 이 글을 읽고 나서 결정해보자. 물론 제목에서 예상되듯 나는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사실 원래 나는 좀비가 나오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사극과 좀비의 결합은 살짝 궁금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사극 + 좀비. 그래서 더욱 볼수록 실망스러웠다.
영화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조선의 인조 시대에 김자준(장동건 분)이라는 병조판서가 '야귀'라는 좀비가 나라에 퍼지고 있는 것을 내버려둔다. 야귀를 이용해서 왕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청나라에 살던 이청(현빈 분)이라는 강림 대군이 조선으로 돌아와 김자준의 야욕을 막고 조선을 구한다는 스토리다.
줄거리를 읽으면서 조금 걱정했다. '전개가 너무 뻔하지 않을까?' 가 내 걱정이었다. 그런데... 정말 너무 예상한 대로 진행되었다. 사극 영화의 주요 줄기로 왕권을 향한 권력 암투가 꼭 나와야 했던 것일까, 하는 것은 일단 내버려두자. 식상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뻔한 스토리라는 심증이 확증으로 바뀌어갔다.
백성들은 가난하지만 의로운데, 신하들은 간신이고 백성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왕의 눈을 멀게 한다. 갑자기 청나라에서 온 강림 대군 이청은,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에 충성스러운 그의 형 봉림대군(김태우 분)과 다르게 여자를 밝히고 가벼우며 껄렁껄렁한 캐릭터다. 여기서부터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눈앞에 펼쳐졌다. 이청이라는 캐릭터가 처음에는 나라에 관심 없고 여자나 밝히다가 나중에 어떤 사건에 의해 마음이 바뀌고,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들겠구나, 하고 말이다.
이번엔 평범한 좀비 영화를 떠올려보자.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이 좀비 떼를 피해 도망치다가, 주인공이 아닌 누군가가 희생하면 모두가 살 수 있는 상황이 나온다. 그러면 그 누군가는 희생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그 누군가는 자신이 물리고 죽어가면서도 주인공 무리의 퇴로는 열어주고 좀비 떼의 길은 막으면서 도망가라고 손짓도 하고 소리도 친다. 그리고 주인공은 오열하며 희생자의 방향으로 가려고 하고, 주변에서 그를 잡고 막는다. 살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느냐는 등의 대사를 하면서. 가끔은 그로 인해 주인공이 각성하기도 한다. 당신은 방금 <창궐>의 이야기를 본거다. 좀비를 야귀로, 주인공을 이청으로, 주변 사람들을 이청을 돕는 백성들로 치환하면 그냥 이 영화 이야기다.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설정도 그렇다. 누군가 죽어야하는 상황이 오면 모두가 자신이 죽겠다고 하는 캐릭터들 뿐이었다. 사극이라는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변주는 없었다.
액션은 신선하긴 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좀비 영화는 기본적으로 긴장감을 깔고 간다. 계속해서 긴장한 채 영화를 보면 지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는 그 배려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적당한 타이밍에 긴장을 이완시켜주는 장치가 필요하지만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청 혼자서 야귀들을 대검으로 물리치는 비슷한 액션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또한, '이제 긴장 풀어도 되나?' 싶은 타이밍이 있는데, 그 순간에서 또 마지막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결국 또 비슷한 액션.
'이게 나라냐', '내가 이러려고 왕이 됐나'라는 대사가 나온다.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시기와 장면들이 있을 거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느껴졌다. '개판이 된 나라를 바로 세워보자, 그리고 그 주체는 민중이다.' 이 정도를 예상했다. 그런데 메시지에 비해 연출이 모자랐다.
'국뽕 영화'라고 욕을 먹기도 한 <명량> 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위에서 전투를 할 때, 그 안에서 열심히 노 젓는 고된 노동을 하는 민중들을 보여준다. 게다가 규모는 작지만 의병들이 전투에 참여하는 모습도 나온다. <명량> 조차도 백성들이 직접적으로 나라를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창궐>에는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 수많은 백성들이 횃불을 들고 궁으로 모여드는 마지막 장면이 이미지로는 촛불 시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상황이 거의 종료된 타이밍이었기에 백성들의 역할을 치켜세우기 애매하다. 오히려 궁 내부 사람들이 마지막 작전을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 나라를 지키는데 더 유효했다. 궁 내부 인원들을 '백성' 혹은 '민중'이라 칭할 수 있으니 된건가? 그렇다면 횃불 든 백성들이 나온 이유는 뭘까?
반면에 촛불 시위로부터 탄핵까지의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들의 참여가 주도했다. 시민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구도였다. 이화여대 학생들의 미래라이프 사업 반대 시위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꾸준히 진행되었던 촛불 시위, 탄핵안 가결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압박한 문자 폭탄(이 일의 가치 판단은 이 글에서 하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높았던 국민의 탄핵 찬성 비율, 탄핵 이후에 진행된 19대 대통령 선거의 높은 투표율까지. 영화에서 이청은 모든 일을 마친 후, '백성들이 있어야 나라(임금)가 있다'는 식의 대사를 한다. 그 대사를 꺼내기에는 영화 속 백성들이 한 일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 실망스러웠던 것은 감독의 인터뷰였다. 김성훈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궁 안에서 일어난 크리처 물을 떠올리다 야귀를 생각했고, 그 이미지를 하나씩 모으다가 '창궐'이 완성됐다. 관객들에게 일단 액션과 함께 즐거움을 주는 오락물을 선보이고 싶었다.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겨주셨으면 한다. (인터뷰 기사 - http://www.nocutnews.co.kr/news/5046572)
사실 배우들의 연기는 모자람이 없었다. 사극의 분위기에 맞게, 약간의 웃음코드도 곁들여서 보기 편했다. 그런데 인터뷰 하나에 이 연기력이 아까워졌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는 수많은 야귀역 엑스트라들의 얼굴과 이름의 나열로 화면이 가득 찬다. 감독 및 배우 등 모든 참여자들보다 더 강조한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책에 등장할만한 기념비적인 사건이 연상되는 대사를 넣었으면서, 170억 가까운 제작비를 들여 만들었으면서, 그는 이 영화를 오락으로만 소비하길 바랐다. 너무나 허무했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 싶어 진다.
내가 이러려고 영화를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