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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슴 Oct 06. 2017

<히든 피겨스>로 보는 선진국의 조건

[영화] 2등 시민의 열패감을 다루는 선진국의 방법

<히든 피겨스>는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나사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 셋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남다른 공학적 재능과 의지를 가진 주인공들이 나사의 우주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되듯 차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 캐서린 존슨은 우주선의 궤도 계산 등의 업무를 하는 전산원으로 일하다가 그녀의 특출 난 능력 덕에 본부에서 일하게 된다. 승진한 것이다. 본부에 갔더니 주변에는 온통 백인뿐이다. 자리에 잡고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서린 존슨은 당황한다. 그 건물에는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800미터 거리를 왕복해야 했다. 직원들이 그녀를 '근무시간에 자주 자리를 비우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장면도 나온다. 화장실 문제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몰라서 본부장이 캐서린을 오해하는 장면도 나온다.



<히든 피겨스> 의 한 장면. 캐서린이 근무 시간에 업무 파일을 들고 다른 건물로 이동 중이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흑인이든 백인이든 같은 사람인데 서로 다른 화장실을 써야 하고 내가 일하는 건물에 나를 위한 화장실이 아예 없다니. 하지만 오히려 별 감정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이 차별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러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나에 대한 차별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억울함과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어떤 노력을 해도 결국은 2등 시민으로 남아야 한다는 필연(?)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다수의 무심함은 때로 누군가에게 열패감을 심어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고속버스 설계 도안을 만드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이 설계자는 어떤 사람을 탑승객이라 상정하고 설계를 시작할까? 그 '어떤 사람'에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포함될까? 포함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고속버스를 이용하지 못하고 쳐다볼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만약 '버스 설계법' 이 있고, 그 법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고려해서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한다'라는 조항이 있으면 어떨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장애인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 만큼 무관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열패감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는 설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경우 모든 버스는 '저상 버스'여야 하고 휠체어가 타기 쉽도록 살짝 인도 쪽으로 기울어지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버스 (출처 : https://www.ianfraser.org/sir-angus-jumps-the-bus/)



제도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무관심 혹은 차별하고 싶은 마음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인류의 차선책은 시스템이었다. 나는 시스템이 제 역할을 해서 약자가 굳이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경제 발전이 잘 된 나라보다 시스템이 약자의 감정을 잘 보호하고 있는 나라를 선진국이라 부르는 세상이 오기를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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