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으로 가는 유로스타

by 히다이드

브뤼셀에서의 하룻밤은 금방 지나갔다. 그랑플라스에 나가 조명으로 빛나는 광장의 모습을 감상하고 주변을 좀 걷다 숙소로 돌아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은 잠을 깨는 순간부터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숙소 체크아웃을 하고 브뤼셀 중앙역으로 가는 길에 전날 와플을 사 먹었던 가게를 찾아갔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하나로는 영 아쉬웠다. 키위와 바나나, 딸기가 들어간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와플을 하나 사서 봉지에 집어넣고 브뤼셀 중앙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유로스타는 브뤼셀 MIDI 역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브뤼셀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며 제 때 MIDI 역에 도착할 수 있을지 속으로 걱정했는데 다행히 늦지 않게 브뤼셀 MIDI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전 시간이어서 그런지 한산했다. 안내판을 보며 유로스타 승강장을 찾아갔는데, ‘CHANNEL TERMINAL’이라고 써져 있는 입구 옆에 영국 왕실 근위병의 사진이 붙어있는 게 보였다. 실제 근위병도 아닌데 그 사진을 보자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유로스타를 타기 전, 짐 검사를 위해 내가 가진 짐들을 전부 검색대 위에 내려놓는데 와플이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자꾸 신경 쓰였다. 모니터에 나타난 뭉개진 와플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직원들의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검색대를 통과하자마자 재빨리 짐을 챙겨 안쪽 대기공간에 서 있는 사람들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제 심사관과 인터뷰를 할 차례였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 심사관 앞에 서게 됐는데 30대로 보이는 깐깐해 보이는 백인 남성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인터뷰에서 뭘 물어볼까 나름대로 예상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원어민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아마 내가 모르는 정중하고 사무적인 표현으로 입국 목적을 물어본 것 같은데, 몇 번을 물어봐도 내가 머뭇거리자 답답했던지 자신이 먼저 "Travel?"이라고 물어봐줬다. 그제야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Yes"라고 대답했고 심사관은 더 물어보지 않고 나를 통과시켰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유로스타 열차가 대기하는 승강장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플랫폼의 시계는 오전 10 시 40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중년의 신사가 탑승객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바로 눈앞의 열차를 놓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에 여유 있게 내가 탈 차량으로 걸어갔다. 객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커다란 배낭에 캐리어 가방, 카메라가 들어있는 크로스백과 음식물이 들어있는 비닐봉지까지 내 행색이 너무 요란했던 것 같다. 열차 안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는데 그중 몇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모르는 척 내 자리로 캐리어 가방을 밀고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와플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최대한 조심하면서 뛰었는데도 많이 뭉개져 있었지만 맛 하나는 변함이 없었다. 맛있게 와플을 먹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께서 “흠흠”하며 헛기침을 하시더니 다른 자리로 옮겨가셨다. 내 배낭을 짐칸에 올리는 걸 도와주신 분이었는데, 바로 옆에서 냄새를 풍기며 먹는 모습을 보는 게 민망했던 것 같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것 같아 죄송했다.


열차가 출발하고 브뤼셀 시내를 벗어나자 창 밖으로 다시 끝없는 평야가 펼쳐졌다. 열차가 도버해협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창밖이 깜깜해지더니 그대로 해저 터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멋진 바닷가가 나오고 그다음에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걸 상상했던 터라 약간 실망스러웠다.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오자 다시 드넓은 평야가 나타났다. 영국으로 넘어왔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잉글랜드 평야는 햇빛도 좋고 왠지 모르게 따뜻해 보였다.


평야를 달리던 열차가 마침내 런던으로 들어섰고, 얼마 후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서 멈춰 섰다. 열차에서 내려 출구를 향해 걸으며 옆에 서 있는 유로스타 열차를 쳐다보는데, 내가 이 열차를 타고 왔다는 게 믿기지 않고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플랫폼을 빠져나오자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춰서 연주가 시작될 수 있는지, 그 장소에서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나 낭만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익숙한 곳, 고향에 온 것 같았고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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