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일주일 동안 묵을 집은 깨끗한 4층 빌라였다.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 몰라서 빌라 앞 공터를 서성이는데 누가 불러서 뒤를 돌아보니 마크 주커버그를 연상시키는 준수하게 생긴 백인 금발 청년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전화로 옥신각신해서 살짝 걱정했었는데 호스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친절하게 나를 집으로 안내해 줬다. 빌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암스테르담과 브뤼셀 숙소에서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던 걸 생각하면 이곳은 천국이었다.
방에 대충 짐을 풀어놓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첫날에 런던의 상징들을 다 돌아보고, 둘째 날부터는 가고 싶었던 장소들을 여러 번 방문할 계획이었다. 우선 런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버킹엄 궁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봤던 낮은 층의 벽돌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영국 박물관이 나타났다. 런던에 온 가장 큰 이유이자 둘째 날부터 여러 번 방문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곳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첫날은 그냥 밖에서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지나갔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런던에 갔을 때 햄버거와 랍스터를 맛있게 먹었다는 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버킹엄 궁을 향해 걷다 트라팔가 광장에 도착했다.
어딘가에서 색소폰 연주가 들려왔다. 대로 옆 건물의 계단에 앉아 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이층 버스, 오후의 햇빛이 드리워진 내셔널 갤러리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여유로움과 운치가 느껴졌고 이 도시가 대영제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잠깐 앉아있다 다시 일어나 바로 근처에 있는 버킹엄 궁으로 향했다. 거대한 아치로 들어서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무심코 왼편을 돌아보니 멀리 하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 끝에 영국 의회 의사당과 빅벤 시계탑이 있는 게 보였다. 그것들이 그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갑자기 등장할 줄은 몰랐다. 길을 건너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아치를 지나 공원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버킹엄 궁전 앞의 분수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분수대 꼭대기에 황금 조각상이 번쩍이고 있었는데, 그렇게 번쩍이는 황금 조각상은 본 적이 없었고 황금이 귀중품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궁전 앞 담장 밖에서 안 쪽의 궁전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파가 몰려온 가운데 국왕이 테라스에 나타나 멋지게 연설하던 영화 속 장면을 상상해 봤는데, 실제 그런 일이 있었던 장소라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화려하고 아무나 다가갈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지는 곳이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장소가 그런 영화 속 장면이 벌어지기엔 너무나 현실적이고 평범해 보였다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