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가로등이라도 환하게 켜져 있으면 좋을 텐데 가로등도 거의 없고 상점도 많지 않아서 거리 전체가 어두침침했다. 운치 있고 낭만적이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내 눈에는 시내 전체가 우범 지역처럼 보였다. 서둘러서 숙소로 걸어오는데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게 됐다.
주변은 죄다 금발의 백인들이었고 길 건너편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얘기하며 어디론가 놀러 가는 사람들, 연인들, 가족들의 모습은 한국에서 봤던 여느 밤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파란불이 켜지고 사람들 속에 섞여 길을 건너면서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다소나마 풀리는 게 느껴졌다. 숙소에 돌아와 호스텔의 라운지에서 사 가지고 온 샐러드와 과일, 빵으로 저녁 식사를 했는데 밥을 아예 포기해서인지 그렇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만 혼자 먹은 게 미안해서 카운터에 앉아 있던 직원에게 사과를 하나 선물했다. 약간 차갑고 지적인 외모였지만 한편으로는 순박하기도 한 매력적인 여자였다. 숙소에서 물은 어떻게 마시냐고 물어봤는데 수돗물을 마시면 된다고, 자기도 그걸 마시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얘기해 주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여행을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면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방에 돌아오니 캐리어 가방만 놓여있던 침대의 주인이 들어와 있었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자였다. 서로 상대방이 한국인이라는 걸 알아본 것 같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희한하게도 뭔가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반갑기보다 당황스러웠다. 그 조용한 방 안에 둘 밖에 없었고, 불을 끄고 자야 하는데 내가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상황이 굉장히 난감했다. 거기에 먼 이국땅에서 홀로 낯선 세상을 돌아다니는 걸 꿈꾸며 왔는데 한국 사람과 한국말로 얘기를 주고받는 게 내키지 않았다. 결국 서로 눈인사만 하고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고 나서 샤워를 하고 짐 정리를 하는데 아무래도 그 상태로는 여자가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용기를 내어 혹시 한국인이시냐고 물어봤는데 역시나 한국인이었다. 서로 간단히 인사하고 여행 계획을 얘기했는데 그 여자 분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이르쿠츠크까지 간다고 했는데 많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짐 정리를 마치고 일찍 침대에 누웠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는데, 침대 구석구석 뿌려둔 빈대 퇴치약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