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해변을 산책할 계획이었지만 눈을 떠보니 씻고 체크아웃 준비를 하는 것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시간이 한국보다 1 시간 빠르다는 것을 잊고 여유를 부리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늦을 뻔했다. 가까스로 늦지 않게 호스텔 체크아웃을 하고 라운지에 짐을 맡긴 후에 점심을 먹으러 길을 나섰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괜찮은 식당이 있으면 들어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어디가 괜찮은 식당인지 알 수가 없었다. 횡단 열차에 가지고 갈 식료품도 준비해야 해서 식당만 찾아 돌아다닐 수는 없었는데 마침 전날 갔던 ‘Clever’ 쇼핑몰의 식당가가 생각났다. 장을 볼 마트도 같은 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괜찮은 한 끼 식사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기분 좋은 점심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볶음밥 비슷한 음식과 샐러드를 먹고 차를 마셨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 건너편으로 커다란 섬이 보였는데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하던 때가 떠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땅을 보며 마침내 미지의 신세계에 도착했다며 환호했을 것이다. 최대한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에 있는 대형 마트로 갔다. 6일 동안 먹을 과일과 빵, 샐러드, 물, 차와 약간의 간식을 샀는데 계산을 하고 나니 어떻게 들고 갈지가 막막했다. 계산하는 분이 비닐봉지 두 개에 나눠서 담아줬는데 숙소까지야 어떻게 들고 가도 숙소에서 역까지 옮기는 게 문제였다. 거기에 5 리터짜리 생수 두병이 있어서 엄청나게 무거웠다. 여행용 배낭을 메고 한 손으로 캐리어 가방을 끌면 손 하나가 남는데 그 무거운 비닐봉지 두 개를 한 손으로 들고 갈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말도 잘 안 통하는 점원에게 사정해서 박스를 하나 얻었다. 거기에 먹을 것들을 담고 박스를 캐리어 가방 위에 얹어서 밀고 가기로 했다. 식료품이 가득한 무거운 박스를 들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과일들은 물로 씻어서 깨끗한 봉지에 넣고, 미리 준비해 간 두꺼운 테이프로 박스를 캐리어 가방 손잡이에 고정시켰다. 호스텔 라운지의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요란스럽게 짐을 꾸리고 있는데 호스텔 사장님이 들어왔다. 40대로 보이는 러시아인 남자였는데 청바지에 티를 입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여유 있고 멋있어 보였다. 내가 벌여놓은 짐들을 보더니 "시베리아 열차?"하고 물었는데, 내가 그렇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스를 캐리어 가방에 고정시키는 걸 도와줬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열차 탑승까지 1 시간이 조금 넘게 남아 있었다. 혹시 늦을까 봐 호스텔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는데 호스텔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밀고 가야 할 캐리어 가방이 너무 무거웠다. 원래 무거웠던 데다 음식물 박스까지 올려놓으니 균형 잡는 게 힘들 정도였다. 거기에 배낭은 또 얼마나 무거운지 서 있기만 해도 어깨가 끊어질 거 같았다. 캐리어 가방을 밀고 가다 힘들어서 허리를 숙이면 가슴에 가로질러 멘 크로스백이 밑에서 시계추처럼 덜렁거렸는데 마음 같아서는 어디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같이 짐을 옮겨줄 사람도 없고 어떻게든 나 혼자 힘으로 역까지 밀고 가야 했다. 숙소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 거리로 따지면 몇 백 미터이고 언덕 하나만 넘으면 되는데 느릿느릿 밀고 가다 보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짐과 뒤엉켜 넘어지기도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쓰러진 캐리어 가방은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도 힘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는 몸짓을 했지만 다들 못 본 척 그냥 지나가 버렸다.
몇 미터 밀다 쉬고, 다시 몇 미터 밀다 쉬기를 반복하며 겨우겨우 언덕길을 올라갔다. 언덕길을 다 올라가자 마침내 내리막길이 나타났는데 내려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제 멋대로 굴러 내려가는 캐리어 가방이 다른 사람을 치기라도 할까 봐 온 몸으로 캐리어 가방을 막으며 힘겹게 언덕길을 내려갔다. 길 건너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역이 나타났을 때 시계를 봤는데 다행히 기차 출발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언제 울면서 캐리어 가방을 밀었냐는 듯 늦지 않게 도착한 것을 감사하며 신나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역사 앞까지 캐리어 가방을 밀고 갔는데 계단이 앞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딱 5 개였다. 5 계단만 올라가면 되는데 아무리 용을 써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통로도 안 보였다. 다시 한번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려는 찰나에 남자 두 명이 옆을 지나갔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러시아어로 “실례합니다”라고 한 후에 도와달라는 몸짓을 했는데 둘 중 한 명이 다가오더니 같이 캐리어 가방을 들어줬다. “감사합니다”라고 연거푸 말하고 나서 문을 열고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맞이방의 의자까지 캐리어 가방을 밀고 가서 자리에 앉고 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는데 커다란 샹들리에가 있었고 요란스러운 밖과 달리 안은 조용했다. 그렇게 앉아서 숨을 돌리고 있으니까 분주했던 마음이 다소나마 가라앉았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차를 타기 전에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발행하는 진짜 시베리아 횡단 열차 표를 얻고 싶었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표를 예매할 때 프린터로 출력한 게 있긴 했지만 역에서 발행하는 종이로 된 진짜 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캐리어 가방을 밀며 티켓 창구를 찾아 나섰다.
티켓 창구와 열차를 타는 플랫폼으로 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의자에 앉아 숨을 돌리는 사이에 다시 자신감이 생겨서 어떻게든 혼자 캐리어 가방을 끌고 내려가려고 했는데, 딱 반 층을 내려가고 앞으로 몇 개 층을 더 내려가야 하는지 알고 나서는 그럴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지나가기만 간절히 기다리는데 마침 군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내려왔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티켓 창구를 찾아갔다. 여직원 앞에서 수첩에 미리 적어둔 러시아어를 읽으려고 했는데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 직원이 내가 A4 용지에 출력한 티켓을 꺼내는 걸 보더니 막 화를 내면서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남자가 데려간 곳에는 티켓 출력기가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다시 화를 내면서 내 여권을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직접 티켓을 뽑아 줬는데 뒤를 돌아보니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거기에 나와 같은 국적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와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역에서 발행하는 진짜 티켓을 손에 쥐고 뿌듯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또 다른 남자 직원이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게 거슬렸다. 장난인지 조롱인지 구분이 안 되는 묘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미소를 지어 보이긴 했지만 약간 불쾌했다. 그런데 이 직원이 나한테 오더니 횡단 열차를 타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바로 옆의 기차를 가리켰는데 기차를 탈 때가 됐다고 얘기해 주려던 거였다. 고맙다고 하며 서둘러서 캐리어 가방을 밀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이 다시 한번 나를 불러 세웠다. 이번엔 또 뭐야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는데 내가 가려던 방향과 반대 방향에 있는 출입구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대기하고 있는 플랫폼으로 나왔다. 내가 탑승해야 할 칸으로 캐리어 가방을 밀고 가는데 가방의 바퀴가 플랫폼을 구를 때마다 “드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기진맥진해서 캐리어 가방을 밀면서도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열차의 경적 소리가 들리고 플랫폼에 러시아어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멀리 내가 타야 할 칸 앞에 제복을 입은 승무원들이 나와 있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