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벌판과 자작나무 숲만 봤는데 얼음에 뒤덮인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TV에서 보던 바이칼 호수였다. 4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호수 위에는 얼음이 덮여 있었다.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아 호수를 보고 있으니까 한기와 함께 호수 위로 부는 매서운 바람이 느껴졌다. 직접 내려가서 얼음을 깨고 발이라도 담가보고 싶었는데 달리는 열차를 세울 수는 없었다. 눈으로만 보며 오는 길에는 반드시 바이칼 호수를 방문하겠다고 다짐했다.
창가에 앉아 바이칼 호수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십자말풀이만 하던 남자였다. 나한테 볼펜을 빌려가기도 했었는데 이 남자와 유난히 자주 눈이 마주쳤었다.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남자와 대화가 시작됐다. 러시아말은 잘 모르지만 수첩을 이용하니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가끔 남자가 내 러시아어 책을 뒤적이며 단어를 찾아서 보여주기도 했다. 건축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내 여행 계획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유럽으로 갔다가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올 거라고 했는데, 오는 길에 이르쿠츠크와 하바롭스크 둘 중 한 군데를 들르고 싶은데 어디를 갈지 못 정했다고 하자 이르쿠츠크를 추천했다. 이 남자가 이르쿠츠크를 추천한 이유도 바로 바이칼 호수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