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경계를 넘다

by 히다이드

같은 칸의 세르게이, 지마, 한국인 동행과 얘기를 많이 한 날이었다. 나와 한국인 동행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자기 침대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지마가 내려와서 내 옆에 앉았다. 같이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영어로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간단히 얘기해 줬다. 한국인 동행도 지마에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는데 속으로 쓸데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전에도 몇 번 영어로 말을 걸어봤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만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날 지마의 입에서 갑자기 영어가 튀어나왔다. 적어도 내가 하는 수준의 영어는 하는 걸 보고 속으로 많이 놀랐다. 영어를 할 줄 알면서 왜 못 하는 것처럼 행동했는지가 궁금해졌는데 어쩌면 자존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에서 왜 미국의 언어로 물어보는 것이냐, 우리가 영어를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어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지나가는 한국인을 붙잡고 일본어로 말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학에서 생태학을 전공한 지마는 생태학과 관련한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었는데 고향에서는 우버 택시 기사로도 일하고 있었다. 고향에 1층이 카페인 호스텔을 지어서 운영하는 게 꿈이었다. 지마와 얘기를 하는 중에 세르게이도 내려왔는데 세르게이는 진짜로 영어를 못해서 지마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야만 했다. 세르게이는 옴스크에서 보안과 관련한 일을 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자기 팔뚝을 보여줬는데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 날 넷이 같이 식사도 했는데 세르게이가 컵라면에 뿌려먹는 마요네즈를 내 빵에 직접 뿌려주기도 했다.


이 날 늦은 오후에 시간대가 바뀌는 경험을 했다. 내 휴대폰 시간은 현지 시간에 맞춰져 있고 손목시계는 한국시간에 고정돼 있었는데, 한 역에서 휴대폰 시간을 보니 손목시계 시간보다 1 시간 느리게 표시되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평소처럼 지나갔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엄청난 속도를 냈던 게 분명했다. 백화점이나 마트 같은 곳에서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는 방향을 거슬러 달려본 적이 있는데, 그 느린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달리는 것조차 힘든 일인데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는 지구를 100 킬로미터도 안 되는 속도로 달리는 기차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의 경계를 가로질러서 그런지 이 날은 해가 유난히 늦게까지 떠있는 것 같았고 몸도 더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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