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를 닦으며

원고야, 안녕!

by 박쥐마담

선생은, 말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 학생들에 비해 나이만 많이 먹었을 뿐, 급변하는 세상에 빨리 적응하지 못해 쩔쩔매는 처지다. 선생이 젊었을 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암기한 지식은 이제 검색 몇 번만 하면 화면에 뜬다. 모두에게 공개된 지식을 자기 혼자만 아는 것처럼 떠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학생들이 배움의 주체가 되도록 만들려면 갑절의 힘이 든다. 2021년 1학기, 18주의 여정이 거의 끝났다. 주중에 이틀 출근해 달랑 두 과목만 가르치면 되는 시간강사인데도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몰래 지구 종말을 빌고 싶어 진다. 내일 기말고사를 치르고 성적 처리만 마무리하면 이 학기도 다른 학기들처럼 봉인되어 묻힐 것이다. 난생처음 출판사에서 선계약을 하고 청소년 에세이를 쓰느라 더 애를 썼던 날들이라는 꼬리표가 하나 더 붙긴 하겠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집에서는 자식들에게 일해라 절해라 하는 처지이므로 긴장을 늦췄다가는 꼰대 망언집을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원고 청탁을 받은 자리에서 그런 걱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는데 편집팀장님께서 검토해주실 거라고 하셨다. 오, 그럼 내가 좀 '오버'하더라도 편집팀장님께만 '쪽팔리면' 되는구나. 그 말씀을 믿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목차에 대한 아이디어 생성 단계부터 편집팀장님과 전화와 이메일로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샘플 꼭지를 쓰고 검토받고 고치고, 그 과정을 또 반복하고, 전체 원고를 완성해서 다시 검토를 받았다. 메모가 붙은 파일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는 글자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출판사로 찾아뵙기도 했다. 부지런히 써넣은 글자들에 가운뎃줄이 그어져 돌아오면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편집팀장님의 눈은 내 눈과 다르고, 그분의 눈에는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 보이니, 나는 열심히 문장을 만들고 그분은 문장을 지우면 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 책을 만든다는 공통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학기와 함께 원고도 마무리되었다. 큰 과제들이 모두 끝난 기념으로 욕조에 두툼하게 덮인 물때를 벗겼다. 과탄산소다가 명약이라는 말은 진리였다. 과탄산소다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엄청난 거품이 일어났다. 나도 못 해본 거품목욕을 욕조가 하다니, 상전이 따로 없었다. 목욕탕에 가서 세신을 받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바이러스 때문에 내 때는 못 밀고 욕조를 때를 벗기고 있다니, 막 성질이 나려는데 거품 사이로 뽀얀 욕조 표면이 보였다. 낡았지만 반짝거리는 욕조를 내려다보니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 화면에 다시 글자를 채워 넣고 싶어 졌다. 팬더믹 이후 자식들이 온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해 학교에 온전히 가지 못하니 전처럼 강도 있게 글을 쓰지는 못한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오늘도 빈 화면을 응시한다. 어떻게 채울지 막막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이 순간을 좋아한다. 글이 잘 안 풀리면 목욕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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