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중2님과 일곱 살 막내를 데리고 타국에서 아침을 맞은 지 아흐레째다. 중2님의 존재는 애들 데리고 놀이터에도 잘 안 나가는 내가 9박 10일짜리 해외 여행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근원이었다. 중2님과 막내는 남자-남자 조합이므로 화장실 탈의실 샤워실동반 입장이 가능하다. 중2님이 막내의 수발을 드는 동안 내 손과 발은 쉴 수 있을 테니, 적어도 ‘집에서나 밖에서나 어차피 애 보는 건 마찬가지인데 나는 뭐하러 돈 들여 해외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푸념은 나오지 않을 거라 믿었다.
중2님은 현재 학원에 다니지 않으신다. 그분이 아직 학원에 매이지 않은 덕분에 옷가지를 대충 챙겨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가벼운 나날도 끝이 보이니 아쉽다. 얼마 전 중2님은 박명수 어록을 읽다가 “공부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는 말씀에 격하게 공감했다. 2018년 여름은 보통 여름이 아니고 더위는 공포가 된 지 오래다. 지옥 불을 연상시키는 무더위와 열대야는 적게 벌어 적게 쓰겠다는 중2님의 인생 소신을 바꾸어 놓았다. 역시, 자연은 최고의 선생님이다. 베짱이에게 개미의 영혼을 불어넣어 주시다니. 귀국하면 중2님은 집 앞 수학 학원에 등록할 예정이다.
헬조선을 탈출, 영국령이었던 동남아시아 모처로 건너와 먹방 순례를 계속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영어가 통하고 한국 돈 천 원이면 아침 식사가 해결되니, 가성비를 따져가며 오늘은 무얼 어디서 어떻게 먹을지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과연 은퇴자의 천국이라 불릴 만했다("이 맛에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이라며 망언을 투척하는 중2님의 입은 잘 틀어 막았다). 허나 무념무상으로 수평선을 바라보며 인생의 여유를 누리기는 아직 이르니, 중2님의 여행 가방 밑바닥에 다음 학기 수학 문제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식도락 여행의 짬짬이 그 수학 문제집을 붙들고 씨름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12년 동안 수학을 공부했지만, 수학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1992년 12월 22일 학력고사 시험장에서 생의 마지막 수학 시험을 치렀고 그날 깔끔하게 수학과 이별했다. 이제 수학이 내 발목을 잡을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확신은 인생을 얼마 살아보지 않은 20대의 오만이었다. 나는 시간 여행자가 되어 25년 만에 삼각형들과 재회했다. 이등변 삼각형의 특징과 직각 삼각형의 합동까지는 그럭저럭 이해가 되었다. 장기기억의 끝에 매달려 있던 내심과 외심을 소환하자 샤프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연결한 원의 중심, 곧 외접원의 중심을 외심이라 하고 삼각형의 세 변에 접한 원의 중심, 곧 내접원의 중심을 내심이라 한다. 삼각형의 외심에서 세 꼭짓점까지의 거리는 같다. 또, 삼각형의 내심은 삼각형의 내각들을 각각 이등분한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러한 내심과 외심의 특징을 계속 떠올려야 했다.
내심과 외심은 사람에게도 있다. 내심은 속마음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실제의 마음이다. 남의 불행을 슬퍼하면서 그 불행이 나에게 닥치지 않아 안심하고, 남의 행운을 축하하면서 그 행운이 나를 비껴가니 속상해도 되는 마음의 도피처가 내심이다. 3%의 염분이 바닷물을 썩지 않게 만들듯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음이 내심이다. 외심은 딴마음이다. 다른 것을 생각하는 마음, 처음에 마음먹은 것과 어긋나는 마음이다. 딴소리나 딴생각처럼 궤도를 이탈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듯 사람 마음도 한결같을 수 없지만, 급격하게 많이 변한 사람의 마음을 문득 마주한 날은 슬퍼진다.
일체유심조, 세상사는 마음먹기 나름이므로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수학 문제 풀듯 그 모양새와 특징을 되짚어볼 때 인생 문제가 풀리는 경우가 많다. 간혹 상위 3%만 풀 수 있는 문제, ‘1등급 문제’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문제는 내 수준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다. 인생 해답지인 성서를 읽고 기도해도 좀처럼 답을 알아낼 수 없다. 전에는 그런 문제를 붙들고 어떻게든 정답을 맞히려고 애를 썼다. 지금은 슬며시 두 손을 든다. 답은 알 수 없더라도, 문제와 씨름하며 오늘 하루 치매가 예방된 것으로 만족한다.
얼른 문제집 두 장 풀어 치우고 게임 삼매경에 빠지겠다는 중2님의 사심과, 학원비를 여행 경비로 끌어다 쓰고 있으니 한 단원은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는 엄마의 흑심이 내심과 외심처럼 꼭지각의 이등분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