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추억팔이

by 박쥐마담

“선생이 미치기 직전 방학을 하고 엄마가 돌기 직전 개학을 한다.”는 말은 비록 속된 표현이지만 선생이요 엄마인 나의 처지에 딱 들어맞는 문장이다. 남의 자식님들이 속말을 꺼내어 문장으로 옮기도록 공을 들이다가 지쳐갈 때쯤 학기가 끝났다. 학기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발 뻗을 새도 없이 방학을 맞은 내 자식님들 입에 하루 세 번 넣어 줄 밥을 지어야 했다. 보통 더위가 아닌 2018년 여름의 폭염에 가스레인지의 열기를 보태면 찌개와 함께 내 영혼도 같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고대하던 개학을 맞아 출근을 하니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만큼 급식 또한 반가웠다. 남이 해 준 밥을 식판에 담으니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가 우러났다. 웬걸, 급식 먹은 지 겨우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 또다시 삼시 세끼 밥 짓기 공양의 특명이 떨어졌다. 기록적인 무더위의 끝에 나타난 태풍은 서울의 유치원생, 초등학생, 중학생에게 난데없는 하루짜리 휴일을 선사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간만에 김치전이나 부쳐 먹으며 집을 방공호 삼으려 했더니만, 제주도와 남도를 강타한 태풍이라는 이름에 영 어울리지 않는 가랑비와 산들바람을 맞게 되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태풍의 진로를 포함하여 인생의 나날들은 예측 불허다.


눈 떠서 아침 먹고 돌아서서 점심 또 먹고 설거지를 마치니 맥이 탁 풀렸다. 콧바람을 넣어야겠다 싶어 박물관으로 마실가자고 자식님들을 꼬셨다. 반나절 만에 방학 모드로 돌아간 그들은 시큰둥했다. 집이 천국인데 어딜 나가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 집에서 박물관 나들이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뿐이지. 분위기 파악한 중2님이 흑기사가 되어 인심을 썼다. 동생들과 함께 집 보고 있을 테니(집 안의 전자 기기를 함께 보고 있겠다는 뜻이겠지만) “추억팔이 잘하고 오시라” 며 길을 터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관람하려는 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88 올림픽과 서울>이었으니.


박물관에서 88 올림픽과 잠실을 추억하게 만드는 사진과 물건에 둘러싸이니 순식간에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던 순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외쳤던 “쎄울, 꼬레아!”는 내 뇌리에 꽤 깊이 박혔던 모양이다. 중학교 영어 시간, 일어서서 교과서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서울을 ‘쎄울’로 발음해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나는 잠실 키즈였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베란다 창문에 화분 걸이를 일괄 설치해 아파트 주민들이 단체로 환경 미화를 하도록 했다. 서울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은 잠실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상계동의 판잣집들이 뜯겨 나갔고 ‘부랑자’는 수용시설에 강제 격리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88 올림픽을 통해 전쟁, 가난, 독재의 이미지 대신 곱게 화장한 얼굴을 전 세계에 알렸다. 30년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나의 중2 시절 올림픽의 뒷모습은 아련하면서도 씁쓸했다.


88 올림픽 개·폐회식에는 학생 1만 5천여 명이 동원되었다. 그중 개막식 매스게임을 주로 담당한 학생들은 여상과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대학입시 등과 관련한 학부모들의 반발 소지를 해소하기 위해 실업계인 상업고(남녀) 1학년 학생 위주로 하되”라고 보도된 기사(중앙일보 1987년 10월 9일 자)를 참조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입시는 언터쳐블, 신성불가침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내 집 중2님도 그 관문을 피해갈 수 없기에 드디어 집 앞 동네 수학 학원에 등록을 했다. 학원 수업 첫날 중2님은 세 시간짜리 수업을 마치고 초췌한 몰골로 돌아왔다. 그룹 코리아나가 30년 전에 예언의 말씀처럼 불렀던 노래 가사처럼,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으려면,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이 되려면, 손에 손잡고 상대평가의 벽을 넘어야 할 텐데, 강북 키즈가 입시를 치르는 2022년에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중2님이 30년 뒤 박물관으로 ‘추억팔이’를 하러 나섰을 때는 가능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