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동남아 순회 먹방 투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내 집 중2님은 동네의 한 수학 학원에 등록했다. 엄마들 입소문에 따르면 그 학원을 차린 원장님은 자녀를 ‘과학고’에 보낸 노하우로 학원을 열었다고 했다. 내가 중2님을 과학고에 보내고 싶어서 그 학원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중학교 2학년 여름에 수학 학원에 첫발을 디딘 학생이 어찌 과학고에 진학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학원이 걸어서 3분 거리이고 학원비가 20만 원대 후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중2님이 ‘레벨 테스트’를 받는 동안 자녀를 과학고에 들여보낸 아버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학부모님들은 중학교 1학년때는 자유학기제로 자녀 성적의 실상을 마주할 일이 없다가 중학교 2학년 1학기 성적표를 받고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며, 내가 중2님을 학원에 데리고 온 지금 이 시점이 학원 등록의 ‘적기’라고 하셨다.
자녀가 자라 제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부모의 원초적 소망이다. 사교육은 그 소망을 먹고 번창한다. 사실, 사교육의 역사는 공교육보다 훨씬 유서 깊다. 전 국민이 공교육의 혜택을 보기 전에도 밥술 뜰 만했던 집에서는 자녀를 동네 서당에 보내지 않았던가. 그러니 대한민국의 많은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고 학원에 다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 집 중2님이 4년 뒤를 대비하기 위해 수학 학원에 온 것처럼, 각종 사교육이 ‘대학 입시’를 향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 꾸준히 오래 그렇게 해야 한다. 문제 풀이에 쏟아붓는 ‘시간의 절대량’이 필요하다. ‘수학 점수를 올려야겠다’는 내적 동기가 없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시간의 절대량을 채울 학생이 있을까? 동네 학원에서 그 절대량을 적당한 가격으로 채울 수 있음을 알기에, 나는 ‘적기’에 자녀를 학원에 보낸 셈이다. 등록을 마치고 나니 내 집 중2님이 초등생 때 집에서 연산 문제집을 푼 것, 중학생이 되어 학교 방과 후 수학 수업을 듣고 대학생 선생님에게 문제풀이 과외 수업을 받은 것은 학원에 등록할 ‘적기’를 놓치지 않을 노림수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맛이 썼다.
학원 등록 첫 주, 중2님은 살짝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주 2회 학원에 가게 되었으나 침대에 기대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몸으로 학원에 가서 세 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도 적잖게 막막했을 것이다. 결국 학원을 들러 귀가한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아, 더럽게 힘드네.” ‘겨우 그걸로? 네가 집에서 뒹굴뒹굴하던 수많은 시간 동안 강 건너편 너의 또래들은......’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문장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월 기십 만원을 학원비로 쓴다면, 평소 가성비를 중시하는 나로서는 들인 돈만큼 그의 성적이 오르기를 기대할 것이고, 그를 들볶을 것이고, 돈값을 하지 않는 그를 미워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일단, 동네 수학 학원에 다니는 선에서 적당한 평안을 얻기로 했다.
학원에 다닌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중2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학교 수업을 듣기가 싫어지더군.” 학원에서 배워서 아는 내용이라 생각하니 학교 선생님의 수업을 건성으로 듣게 되더라는 그분의 간증으로 나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 느끼게 되었다.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느끼지 않을 가책이었다. 대체 이 죄책감은 누구에게로 가져가야 사함을 받을 수 있으려나? “알아도 또 들으면 더 확실하게 알게 되지 않을까?” 나는 헛말을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내뺐다. 주여, 이 죄 많은 모자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