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가야지?”
아버님께서는 모르셨을 것이다. 당신께서 방금 ‘시간 정지 마법’을 쓰셨다는 사실을. 명절을 맞아 한 상 가득 차려낸 음식을 맛있게 먹은 뒤, 사촌들과 어울려 소파에 앉아 한창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내 집 중2님에게 하신 이 말씀으로 일순간 얇은 냉기가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10대 청소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무응답 혹은 영혼 없는 응답이다. 전자의 경우 천천히 목을 움츠리면서 하던 일에 집중하면 된다. 내 집 일곱 살 막내가 잘 쓰는 방법, ‘못 들은 척’이다. 그러나 말귀 알아들을 만한 나이의 청소년이 이런 태도를 보이면 어른을 무시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목을 살짝 앞으로 빼면서 감탄사 ‘아’를 발화한다. 일단 어른 말씀을 듣고 있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어서 빠르게 ‘네에’를 붙인다. ‘네에’는 착한 10대 청소년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체득한 응대 기술의 압축판이다. 내 생각과 다른, 내 생각을 밀고 들어오는 어른 말씀에 동의하는 척 ‘네에’라고 말할 때마다 소신대로 살아갈 힘을 조금씩 잃을 수 있어 위험하기도 하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다가는 어른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있음을 들켜, 등에서 불이 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평소 내 집 중2님은 특유의 화법으로 ‘시간 정지 마법’을 푸는 비책을 연마해왔던 터, 과연 할아버님 앞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수능 2개만 틀려야 하는데(요)?” 중2님은 맑고 경쾌하게 답했다. 아, 아들아. 너는 일관된 인간이로구나. 어른 기분을 맞추기 위해 속말을 감추는 어미와 다르구나. 너는 말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구나. 심지어 너는 고급 기술을 쓰고 있구나.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할아버님의 기대가 너에게 과도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만, 어미는 조금 염려되는구나. 할아버님께서 네 대답에 담긴 너의 진의를 이해하실지. 손자녀에 대한 기대와 염려는 무한한 애정에서 나오는 법이라, 그리 쉽게 철회되지 않는단다.
“그래도 남자가 한번 뜻을 품었으면, 해 봐야지!” 역시 예상한 대로다. 여기서 ‘남자’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포함하는 ‘사람’의 개념으로 해석하자. 섣불리 페미니즘 논쟁으로 접어들어서는 곤란하다. “요즘은 서울대 나와도 취직이 안 돼요.” 그래. 그리되었지. 그나마 공부하면 먹고 살 수 있었던 세상이 저물고 있으니. 할 줄 아는 것이 공부밖에 없었던 너의 어미와 아비가 상상하지 못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무섭구나. “저 중1 때 수학 50점 맞았는데요.” 이런, 네가 필살기를 쓰고야 말았구나. 솔직한 자기 고백은 상대를 무장해제시키지. “그러면 어떻게 먹고살 건데?” 할아버님의 이 말씀은, 평소 스마트폰을 붙들고 침대에 옆으로 길게 누운 네 뒤통수에 대고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하구나. “(어떻게든) 잘 먹고 잘살면 되죠.” 해사한 서울내기의 대답에 좌중은 모두 웃었다.
사실, 할아버님께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네가 조금 알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할아버님께서 네 나이에 공부를 더 하지 못하게 되신 것, 타지로 나가 돈을 벌기 위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생을 하신 것, 그러면서 네 아빠와 큰아버지, 고모를 키우신 것을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삶의 무게는 어미도 잘 가늠하지 못할 정도란다. 너는 중2이니 아직 어른 말씀에 담긴 마음과 맥락을 충분히 헤아릴 수 없겠지. 그건 앞으로 천천히 배워가게 될 거다. 그런데 아들아, 알고 있느냐? 여기는 기대를 넘은 말들이 화살이 되어 날아다니는 대한민국, 그 화살에 맞지 않으려고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가는 대한민국이란다. 그런데 너는 네 나이보다 무려 60살 더 많은 분과 현실과 진실, 사랑이 담긴 문장을 주고받았구나. 네게서 세대 간 갈등을 극복할 가능성, 한국 사회의 희망을 보았다면 ‘오바’가 되려나.
훈훈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대화는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아버님께서는 말 나온 김에 중1 손녀에게도 훈시의 말씀을 주고자 하셨다. “요즘은 중학생들도 연애한다는데, 그러면 못쓴다. 공부하기 전에 연애하고 그러면.” 그 순간, 서울에서 내려온 중2님에게 감추어져 있던 비기가 튀어나왔다. 중2님은 흑기사 변신 마법을 사용하여 사촌 여동생을 구하는 동시에 어른 말씀이 잔소리로 바뀌지 않도록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할아버지, 지금 연애 안 하면요, 나중에도 못 해요.” 암, 중2님아. 뭐든 지금 하자꾸나. 특히, 사랑을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