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님의 지혜로운 말씀
배가 고팠다. 밥을 지을 기운이 부족했고, 먹고 나서 치울 생각을 하니 더 지쳤다. 평일에는 가능하면 ‘집밥’을 해 먹이려고 애쓰는 편인데, 왠지 주방에 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뚜껑이 열리거나 마음이 축축해질 것 같았다. 최대한 신속하게 배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 앞 건널목에서 초록 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보통 세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막내 손을 잡는데, 그날은 중2님이 막내를 데리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내 옆자리를 차지한 둘째 딸의 손, 그 손에 내 시선이 쏠렸다. 한겨울도 아닌데 각질이 허옇게 일어난 손을 보니 배고픔은 짜증으로 변했다. 나는 딸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또, 손!”
길바닥에서 아이를 나무라는 무식한 엄마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십오 년 동안 아이들 셋을 키우면서 내 인내심의 한계를 몇 번 보았기에 어지간해서는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안타깝게도 몇 가지 변수가 끼어들면 순식간에 이성은 마비된다. 지금처럼 ‘배고픔’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손 씻고 로션 바르라고 했잖아. 로션 바르는 게 어려워? 넌 니 몸 관리를 왜 안 해?” 바로 그 순간, 중2님은 단 한마디로 내 짜증을 제지했다. “얘가 로션 안 발라서 엄마한테 손해를 끼치나?” 나는 그 말에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입속으로 웅얼웅얼, ‘보기에 안 좋아’까지는 연결했지만 차마 그 말을 소리내어 발음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반듯하고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균형을 잃으면 ‘남들’ 눈에 반듯하고 훌륭하게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변한다. 그 마음을 품고 있으면 내 아이의 부족한 점이 자꾸 떠올라, 아이의 존재 자체만으로 감사하기 어려워진다. 소노 아야코 여사는 <약간의 거리를 둔다>에서 말했다. 자녀는 철저하게 타인이며 타인 중에 특별히 친한 타인이라고. 교도소를 출소한 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사이를 예로 들며 자식이 아니라면 이처럼 정성 들여 대접하는 타인이 또 있겠냐고 했다.
나는 엄마의 잔소리에 적극적인 대거리를 하지 못했던 딸로 자라나 뒤늦은 사춘기를 겪었다.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을 딸에게 또 물려줄 수는 없는 법. 중2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리. 장차 닥쳐올 딸의 사춘기에 입을 지 모르는 손해를 피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