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 : 의도치 않게 식식대는 주부의 근무 일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로 시작되는 남진의 <님과 함께>는 1970년대 한국인의 주거 로망을 반영한 노래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이국풍의 집 이미지는 이발소 그림에서 왔으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추진했던 새마을 주택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이희봉 외, 『한국인, 어떤 집에서 살았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7, p. 102~103). 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혹은 어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귀동냥해 들은 1975년생이다. 나는 잠실 아파트촌에서 십 대와 이십 대를 보냈고, 결혼해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주택이 아닌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파트에서 대부분의 생을 살았지만 내 기억 속 ‘그림 같은 집’으로 기억되는 공간이 있다. 서울시 중구 신당동 251-84번지다. 나는 신당동 외할머니댁에서 약 2년 동안을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신당동 집은 일제시대 고급 주택 단지, ‘사쿠라가오카’ 안에 있었다. 사쿠라가오카는 경성부의 문화주택지 중 가장 대규모이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자회사인 조선도시경영회사가 개발한 주택지였다(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2016, p. 260)’. 지금은 상업지구로 바뀌어버렸지만(동대문 패션몰 헬로apm 바로 옆이다), 내가 살았던 1980년대 초반에 그곳은 고즈넉한 주택가였다. 축대를 쌓아 올린 일본식 주택을 개조한 신당동 집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생생하다. 안방을 둘로 나눈 미닫이문, 어린이 네 명이 함께 탈 수 있었던 뒷마당의 철제 그네, 가을이면 양동이 네 개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열매를 많이 맺었던 대추나무는 지금도 손에 잡힐 것 같다. 동생과 나는 집 안과 마당에서 노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 집에는 즐겁고도(소파와 피아노가 있던 응접실) 무서운(지하실은 내려가는 계단 입구부터 축축하고 무거운 냄새가 났던 지하실) 공간이 섞여 있었고, 큰이모와 사촌 언니, 막내 삼촌이 함께 살고 있어서 심심할 새가 없었다. 당시 우리 식구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외할머님의 식객이 된 처지였는데도, 나는 신당동 집에서 꽤 행복했다.
주부가 된 이후, 주택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간간이 해 보았지만, 곧 지워버렸다. 아파트에 사는 것과 비교할 때 도저히 집을 관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출금 이자를 내며 사는 처지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렇게 17년을 살았다. 살다 보니 반전이 일어났다. 전세 기간이 만료될 무렵, 남편이 목소리를 냈다. 자신의 방을 갖고 싶다는 말에 “그래요, 나도 내 작업실 갖고 싶습니다. 로또 사러 나갈까요?” 할 수도 있었지만,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사춘기 자녀만 자기 공간을 갖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런데 방법이 없지 않은가. 우리에겐 뭐니 뭐니 해도 충분한 ‘머니’가 없으니까. 여기서 한 번 더 반전이 일어났다. 동네 부동산에서 방 여섯 개 짜리 전세 매물을 보시겠냐는 연락을 준 것이다.
토요일 오전, 남편을 앞세우고 막내와 함께 집 구경을 나섰다. 둘째가 다니는 초등학교 뒤편, ‘초원 위’는 아니고 ‘언덕 위’ 주택가에 있는 집이었다. 대문을 열어 주신 사모님은 그 집에서 이십여 년을 사셨다고 했다. 앞마당을 지나 현관에 들어서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조금 낡았으나 잘 관리된 집이었다. 층고가 높았지만 채광이 좋아 난방비가 많이 들 것 같지 않았다. 안방 안에는 문들이 많았다.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미닫이문을 열면 또 작은 방이 나왔다. 그런 작은 방들까지 포함한 방 여섯 개와 화장실 세 개, 지하실과 2층 베란다가 (주부를 잡아먹을 태세를 갖추고) 남편을 유혹하고 있었다. “지하에는 당구대를 놓고, 1층 방 하나는 서재로 하면 좋겠어.” 17년 동안 자신의 방을 가져보지 못한 남자는, 대지 100평의 이층집에 매료되어, 자신이 직접 다 관리하며 살겠다는 말까지 했다(이 말은 녹취를 해야겠고). 우리의 가용 예산을 웃도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주택이라 전세자금 대출도 안 될 텐데 방법이 있냐고 물었더니, 모자라는 전세금은 월세로 전환해서 내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집이 마음에 드나보다, 40대 아재의 로망은 무섭구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지 못해 출근하는 사람 뜻에 손들어주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부동산 사장님이 금액까지 다 맞춰 주셨는데 마지막 반전이 일어났다. 노부부가 관리하기 벅차 전세로 집을 내놓으려는 뜻을 꺾은 분들은 다름 아닌 노부부의 자식님들이셨다. 남편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 팔자에 무슨 ‘그림 같은 집’이냐. 그림 같은 집 그림이나 하나 사서 벽에 걸고 말자며 남편을 위로했다.
내가 지금 사는 아파트는 1층에 동향이라 아침나절에만 잠깐 햇빛이 든다. 관리사무소와 노인정을 겸한 건물에 가려 종일 어둡다. 집주인이 6년 전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들여다보이는 것이 싫다고들 해’ 불투명 유리창으로 교체해 준 덕분에 일단 집에 들어오면 밖을 볼 수가 없다. 이런 환경은 나의 불면증과 우울증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신, 아이들이 원도 한도 없이 층간소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뛰어놀기엔 좋았다. 그림 같은 집으로 갈 수는 없어도 햇빛 드는 집에는 가고 싶다는 내 말에 중학교 2학년 아들이 질문을 던졌다. “맨날 돈 없다 돈 없다 하면서 왜 돈 쓰면서까지 이사를 가?” 아아, 아들아. 4년 동안 맘껏 뛰어놀더니만 급속도로 철이 들어 경제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되어버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