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 : 의도치 않게 식식대는 주부의 근무 일지
삼사 년 전인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미국 사람이 된 선배가 휴가를 보내러 한국에 왔다. 그 덕분에 함께 한국에 살고 있어도 얼굴 보기 어려운 선배들을 단체로 보게 되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 선배 한 분이 나를 보시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셨다. 인사 다음 말씀이 “혜덕이, 밍크 입었네?” 였다. 이건 밍크가 아니고 위즐(weasel)입니다. 위즐과 밍크 모두 족제비과인데 밍크보다 한 급 아래라 할 수 있죠. 잘 아는 곳에서 ‘패밀리 가격’으로 200만 원에 샀습니다. 사면서 모피 목도리와 장갑도 사은품으로 받았죠. 전화번호 알려드려요? 1초 동안 다섯 문장이 혓바닥을 간질였지만 감히 발화하지는 않았다. 그분 기억 속에 나는 없는 집 자식으로 기억되어 있을 텐데, 사치의 대명사인 모피 코트를 입고 나타났으니 꽤 신기했던 모양이다.
사람마다 소비 패턴이 제각각인데, 나는 옷 사는 데 십만 원 넘게 쓰면 왠지 아깝다. 작년과 올해 줄곧 입고 다닌 롱패딩도 9만 9천원 짜리다. 남이 준 옷도 잘 입는데, 그걸 아는 주위 분들이 옷을 주시고, 이렇게 저렇게 섞어서 입고 다니면 한 철 지나간다. 그렇다고 꾸미는 걸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편은 결코 아니다. 패션 리더까진 아니어도 ‘모양내기’를 좋아한다. 내 형편 - 외벌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아이 셋 키우는 - 에 맞는 소비를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올겨울 초입에 니트를 한 벌 샀는데, 친구 하나가 그 니트와 비슷한 디자인의 니트를 비슷한 시기에 샀다. 나와 친구는 각각 그 옷을 이 코트 저 패딩 안에 입고 겨울을 나고 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또 ‘그 옷’이냐며 서로 웃는다. ‘그 옷’은 옷이 아니라 피부인가보다. 겨울용 피부.
어려서나 지금이나 10만 원 넘는 옷을 생각 없이 살 처지는 아닌데, 모피 코트를 사서 걸치게 된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8년 전, 셋째를 임신하게 되어 임신 기간 내내 우울하고 괴로운 날들을 보냈다. 안 낳을 수는 없고, 낳자니 기를 일이 끔찍했다. 출산 장려금 100만 원 던져주고 할 일 다 했다는 나라에서 셋째를 키울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분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린가 하시겠지만, 아이 둘 어느 정도 사람 만들어 놓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고 싶은 여성에게 대한민국은 꽤 불친절한 나라다.
그런 억하심정에 강림한 ‘지름신’을 영접하여 모피 코트를 사게 되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지만, 내 아기는 내게 모피를 안기리라. 제왕절개로 5박 6일 입원을 해야 했는데, 1, 2인실 입원비를 계산해보니 금액이 꽤 되었다. 어차피 남편은 해외 파견근무 중이라 옆에 있을 수도 없으니, 6인실에서 버티면서 돈을 아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돈에 지자체 출산장려금을 더해, 셋째 출산 한풀이로 내 옷장 한구석에는 모피 코트가 걸렸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낼 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동물의 비명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 귀에는 다른 비명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난데없는 임신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임신 축하한다는 사람들의 말에 우아한 미소로 답할 뿐 마음속을 내보일 수 없었던, 나의 소리 없는 비명이.
호모 사피엔스는 짐승의 가죽을 벗겨 걸쳐야 겨울을 날 수 있었다. 현대인은 다르다. 소비욕을 채우려고 고가의 외투를 산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따른다. 돈은 돌고 경제는 굴러간다. 자기 과시는 털의 결을 따라 반짝인다. 많이 간소해졌다지만, 명품 가방과 모피 코트는 여전히 결혼 예단의 연관 검색어다. 입어보기 전에는 이렇게만 생각했었다. 막상 입어보니 가볍고 따뜻했다. 엄마도 한 벌 사 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엄마, 한 번 입어 보세요.” 젊은 날, 명동 의상실에서 옷 맞춰 입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노셨다는 엄마는, 옷치레는 헛되고 헛되다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래도 걸쳐나 보시라고 권했다. ‘태가 난다’는 말은 이런 순간에 써야 옳았다. 흰 커트 머리에 검은 위즐 반코트를 걸친 그분이 “즈드랏스부이쪠”라고 인사를 건넨다면 러시아 귀족의 후예라고 해도 속아 넘어갈판이었다. “모피 코트 입으면 뭐 하냐. 주머니에 천 원도 없는데. 누가 돈 달라고 할까 무섭다.” 흠, 달랑 후불식 교통카드 한 장 지갑에 넣고 지하철 타고 다니는 시간 강사가 입기에는 역시 생뚱맞은 옷인가. 남은 반평생 입는다 생각하면 가성비는 나쁘지 않은 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