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끝 Feb 27. 2018

'매너리즘'은 온도차에서 시작된다

자본권력에 무뎌진 펜촉

지난해 벚꽃이 피기 시작하던 4월 초. 5ㆍ9장미대선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인사가 났다. 정치부에서 사회부로 가게 된 것이다. 통상적으로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등 선거와 관련해 큰 이슈가 앞두고 있을 때에는 인사가 잘 나지 않는다. 선거를 앞둬 인사가 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짧게는 반년, 길게는 1년 이상을 부서원 간 호흡을 맞춰놓아야 선거보도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다. 팀플레이가 괜히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인사는 바라 왔던 일이었다. 정치부에서 1년 넘게 있으면서, 기사를 쓸 동력을 점점 잃어갔기 때문이다. '열정적으로 기사를 쓰겠다'던 신념이, 금세 매너리즘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자본권력'에 점점 무뎌지는 펜촉을 보며, '이래선 안 되겠다'라는 위기감이 들어서다. 정치부에 있으면서 협찬과 광고 및 예산지원 등과 직결돼 있는 부분이 많다 보니 비판 기조의 발제가 '킬' 당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부서를 옮긴 지 얼마 안 돼 국방부의 용역 보고서를 단독으로 입수한 적이 있었다. 그동안 언론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사실, 운이 좋게 '얻어걸린 것'이었는데, 데스크에서는 내가 물어온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3년 차 밖에 되지 않은 녀석이, 1면 톱에 내걸 수 있는 아이템을 가져왔으니 얼마나 대견하겠는가. 나의 단독보도 이후 타사에서도 이슈를 쫒아오기 시작했고,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에서도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 이후에도 수차례 단독보도를 할 수 있었고, 동종업계는 물론, 출입처ㆍ기자실 등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처음엔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선배들도, 하나둘씩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만의 영역이 구축되기 시작한 셈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동이 트는 새벽녘이 기다려지곤 했다. 그것도 매일. 내 바이라인이 내걸린 기사를 볼 수 있어서, 또 다른 하나는 '오늘은 이걸 써야지'라는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어서. 


이처럼 부서 내에서 주어진 몫 이상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기사를 써나 갈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어느 순간부터 매번 발제할 때마다 '킬' 되거나 기사가 축소되다 보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론, 위기감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아예 안쓸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데스크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쓸 때가 많았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데스크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맞춰지고 있었다. 몰개성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내 능력 부족이라면, 수긍하고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하는 게 맞지만, 취재를 했던 아이템이 타사에서 보도되는 경우가 잦았다. 분명,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부서도 그렇겠지만, '이거다 싶은' 아이템은 먼저 쓰는 사람이 임자다. 아끼거나, 묵혀뒀다가는 똥 된다. 특히 관의 경우엔, 주간ㆍ월간ㆍ분기별ㆍ연간 단위로 촘촘히 업무계획이 세워지기 때문에, 기사가 될 만한 것을 뽑아내 취재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단독 아이템도 여기서 종종 나온다.


문제는 먼저 아이템을 뽑아 놓고도, 쓰지 못해 묵혀놓는 경우가 늘다 보니 데스크와 마찰을 빚는 경우가 잦아졌다는 점이다. 데스크는 대놓고 '쓰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야마가 부족하다'라든지, '나중에 쓰자' 등의 말로 정당성을 부여하곤 했다. 어쩌다 쓰기라도 하는 날에는 '드라이하게 가자', '톤 조절하라' 등의 전제조건이 달렸다. 그러다 보니 자기검열이 일상이 됐다. 나쁜 쪽으로. 지금 당장 광고나 협찬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추후에 집행될 광고와 협찬을 위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 번은 정부 산하 공기업 임원의 임기와 관련해 발제거리를 물어온 적이 있다. 이미 임기가 지났는데도, 수개월 이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데스크는 내 메모를 보고선, 어이없어하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면서. 그래서 기사화할 수 없었다. 지나고 나서 알고 보니, 그 공기업과 연중 캠페인을 벌일 예정에 있었단 걸 알게 됐다. 그 기사를 썼다가는, 수 천만 원에 달하는 기획보도 자체가 엎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아이템은 몇 개월이 지나 다른 선배의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됐다. 여기에 매번 회의 때마다 기자정신과 알 권리를 들먹이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비판 기사를 쓰지 말라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이처럼 둘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면서, 온도차는 더욱 심해져만 갔고 더 이상 기사를 쓰는 게 즐겁지가 않고, 오히려 싫어지는 매너리즘으로 귀결됐다. 기자인 이상, 매일 발제를 해야만 했다. 적어도 '나'를 잃고 싶지 않아서 기사를 쓰든, 쓸 수 없든, 여태껏 해온 대로 매번 비판기사를 발제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엔 없어서다. 내 취재메모를 보던 데스크는 매번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데스크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다른 부서로 옮겨지는 기회가 마련된 셈이다. 그렇게 그와의 불편했던 '동거'는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 인사 단행으로 인해 마침표를 찍게 됐다. 지나서 생각해 보니 철없는 녀석의 항명일 수도 있겠다 싶다. 종이신문의 사양화가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광고ㆍ협찬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갈수록 자생력(自生力)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광고ㆍ협찬은 신문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요소가 됐다. 그런 상황에서, 내 발제는 그걸 건드리는 행위가 된 셈이다. 광고 유치와 저널리즘 구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데스크의 고충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돼 버렸다. 하지만 이 같은 위기를 언론이 스스로 자초한 건 아닌지도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묻고 싶다. 자본권력에 옥죄어 있는 구조적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얼만큼의 노력을 했는지를. 특별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언론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면 무게를 둬야 할 곳은 더욱 분명해진다.


사진=진정한 '저널리즘'을 구현하기 위해 힘썼던 보스턴 글로브 '스포트라이트팀'을 다룬 영화 <스포트라이트> 스틸컷.

매거진의 이전글 기자로 살면서 좋았던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