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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끝 Jan 05. 2021

그곳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가지 않으면, 걷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에 관하여

캡슐에 담긴 약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서는,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두통약이다. 회사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가방 한 켠에는 줄곧 이 약이 자리해 있다. 예전엔 거들떠도 안 보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아무리 강한 척하려 하여도, 본질적으로는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나란 사람은. 이 약은 이따금씩 색깔이 하얗다가, 파랗다가 해진다. 약이 지속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약의 이름과 색상은 달라도, 성분이나 함량은 아예 똑같다고 한다. 요즘엔 이런 약이 많다고 한다. 


조금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날 좋은 날에, 몸을 움직이고 나면 괜찮아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정해져 있는 출퇴근 경로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자주 걷는 길이 있다. 나의 첫걸음은 전철역과 저만치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이 비교적 드문 연희동에서 시작된다. 좁은 골목에서 맞닿을 수 있는 연희동 특유의 정적은, 온전히 걷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연희동에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높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마주하며, 발걸음을 내딛고, 또 내디뎠다. 그렇게 좁은 골목을 몇 번 지나다 보면, 동네와 또 다른 동네의 경계를 이루는 굴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연희동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는 방증이다.


적적함이 그득한 연희동을 벗어나면, 예전에 있던 곳과는 또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조금은 번잡스러우면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해짐을 느낀다. 연남동에 와 있다는 얘기다. 다시 발걸음을 뒤로 돌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공간이 나타난다. 그렇게 굴다리를 두고 서로 다른 공간이 자리해 있음을, 걸으며 절감한다. 공간이 주는 경험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을 찾아가서 걸었기 때문이다. 가지 않으면, 걷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


제아무리 걷는 데에만 집중하려 하여도, 각각의 공간이 주는 느낌이 견경한 나머지 기하려 하여도 기할 수 없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새로이 알게 되거나, 겪지 못하던 걸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소중하다. 연희동과 연남동은, 그 길은 걸음을 내디딘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곳에만 집중하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즐거움과 소중함을 오롯이 느끼다 보니 좋지 않던 몸상태는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음과 생각의 주객이 전도되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덧붙여 언젠가 이 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서, 서로 눈을 마주하며 함께 걷고 싶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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