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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끝 Jan 04. 2021

그것이 인생이며, 살아 숨 쉼이다

때때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 더 나은 선택이 되기도 한다.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하여, 부득이하게 내렸던 결정이 어쩌면 더 나은 가치를 가져올 수도 있단 걸 우리는 안다. 하지만 잊고 살아간다. 부담의 무게를 짊어진 채. 알면서도 내려놓지 못한다. 반드시 도출되어야만 하는 결과라는 굴레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곳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서다. 떼어낼 수도, 지워낼 수도 없는 그림자 속에 서. 하지만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다만,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생각과 몸이 존재한다.


예전에 <할아버지와 손자>에 대한 도슨트의 전시 설명을 들으며, 화가 박수근의 삶을 음성을 통하여 투영하여 바라본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그간 망각하여 왔던 걸 몇 번이나 읊조릴 수 있었다. 보통학교 졸업이 전부인 그가,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일본 유학도 가지 못했던 것은 천추의 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이 여기는 일말의 판단에 불과하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 아닌, 보이는 걸로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을 헤아려 가려버리는 것이다. "하나님, 저도 이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가 평생 지닌 바람이었다.


환경을 두고 탓하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유학보다 더 나은, 독학을 통하여 서양의 미술을 따라한 일본 근대 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히려 독자적인 그만의 화풍을 구축하는 계기가 작용하였다. 그가 품었던 본질이, 열망하여 왔던 영역에 들어오게 만들었던 기폭제가 되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 더 나은 선택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살아 숨 쉼이다.


지금까지는 이야기가 혼자만의 이야기였다면, 둘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다.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만남에는 서로가 지향하는 가치가 담긴 부유물이 그 둘만의 영역 안에 둥둥 떠다닌다. 때때로, 크기가 작은 나머지 눈에 차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분명 우리만의 공간 내에 존재한다. 혹여 보이지 않더라도, 있다고 여겨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둘을 잇는 실이 팽팽히 동여매어지지 않더라도, 마지막까지 끊어지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발악이다. 어쩌면 모든 감정이 부자연스럽게 얽매이고 있을 지어도, 억지로 그걸 벗어나려 해선 안 된다.


박수근의 삶 속, 불가피한 선택으로 인하여 탄생한 위대한 결과물을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된 것처럼, 두 남녀 사이의 어떠한 결정에는 어떠한 이유가 존재한다. 명분은 없을지 몰라도, 무쓸모란 없다. 그것이 좋든, 좋지 않든 간에. 지금은 좋게 여길 수 없다 하여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그 무언가가 되기도 한다. 무엇을 단정하는 인간 고유의 사유 작용을 조금은 내려놓아야 한다는 얘기다.


어쩌면 지난 시절의 결정으로 인하여 누군가를 탓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들이게 되었다면, 미루지 말고 모조리 우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때늦게 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갑작스레 드는 생각의 대부분은, 다음 날이면 그때의 감정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되기도 한다. 일종의 감회인 셈이다. 내일이 오면 두서없는 생각과 감정이 온전히 소멸되어 버릴  알기에, 분출하여 이렇게 적어 내려간다. 이처럼 급작스레 일어나는 마음과 기분은 스스로를 살려내어, 살아갈  있게 만드는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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