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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끝 Jan 06. 2021

내가 만든 상처가, 되돌아온 것 뿐이다

말과 글을 조심히 다뤄야 하는 사유에 관하여

상대방에게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가상으로 내가 말을 건넬 상대방이 먼저 되어 보는 것이다. 상대방이 말을 내게 건넸을 때, 확실하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이 설 때 '해도 되는 말'이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기준이 제각각 다를 수 있는 만큼, 자신이 듣기에 문제가 없어 보여도 사람에 따라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말은 항상 보수적인 기조로,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같은 과정이 어렵지 않아 보이다가도, 정작 일상 속에서는 적용하지 못하고 실수를 저질러 내뱉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주기도, 반대로 받기도 한다. 그래서 어렵다. 말과 글이 서로 오가지 않으면, 상처를 받을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더 깊게 생각해보면 말과 글이 없이,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 수 없다. 교감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니까. 


이처럼 말과 글은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정말 필요하면서도, 쓸 때에는 정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도구이다. 항상 조심히 다루려 노력하지만, 그게 잘 안될 때가 많다. 그래서 괴롭다. 그러다 보니 말을 아끼려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 못한 말을 글로 치환한다. 실수를 줄이기 위한 일종의 미봉책인 셈이다. 물론, 글도 조심히 다뤄야 하는 게 맞다. 그래도 실수를 해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처음 보는 사람들로부터 ‘말 수가 별로 없네요’라는 말을 적지 않게도 들어왔다. 실제로는 적은 게 아닌데 표면적으로 적어 보이려는 노력을 하니 말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친구가 건넨 말로써 큰 상처를 받았다. 잘 생각해 보면 나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쌓아온 관계에 대한 허무함이 온몸을 뒤엎었다. 그 정도로 아팠다.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멈추지 않을 정도의 그런 깊은 상처처럼 여겨졌다. 덧붙여 그간의 내 인생이 부정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쓰리고 아프지만, 내가 뱉었던 말로 인해 상처 받았을 다른 누군가를 떠올려 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상처를 건넨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주었던 상처가, 다시 내게 돌아온 것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분명 그것이 맞을 것이다. 때문에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업보이다. 그리하여, 상처가 아물 시간에 나를 깊이 되돌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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