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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끝 Mar 09. 2022

사울 레이터가 건넨, 따듯하면서도 명징한 메시지

"나는 대단한 철학은 없다. 카메라가 있을 뿐"

얼마 전 피크닉에서 열리는 <사울 레이터 :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전시회에 다녀왔다. 그의 작품을 만나는 동안, 글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다 며칠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의 사진을 회고한다. 휴대전화에 담긴 사울 레이터의 작품을 다시 돌려보며,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를 명징하게 알 수 있었다. 비 오는 거리와 눈 내리는 풍경을 어찌도 그리 따듯하게 프레임 안에 담아낼 수 있었을까. 실제로 그가 사진을 찍던 시점은 춥거나, 쌀쌀하거나 서늘한 날씨였을 텐데, 그의 손을 통해 사진에 담긴 모습은 더없이 온기 넘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햇살이 가득 들어찼다. 겨울에 그의 작품을 마주하였지만, 반대로 수은주는 올라갔고 겨울이 아닌 여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분명 그랬다.


흔히 사울 레이터와 그의 사진을 두고, 재평가를 받고 있는 사진작가와 작품이라고들 한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엔 사진이라는 장르가 주류가 아닌 데다 저널리즘의 일부로 분류되었으며, 일부의 사진만이 비평가 사회에서 다뤄질 수 있었다. 작품세계에 귀함과 천함을 나누는 게 옳은 걸까. 붓을 통해 유형의 결과물을 만드는 그림처럼, 사진 역시 카메라를 통해 세상의 풍경을 찰나의 시점에서 관조하고 담아내는 엄연한 결과물인데 말이다. 재평가란 표현도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평가에 대해선 늘 의문을 갖고 있다. 평가 시점에 주류로 자리 잡은 관점과 시각에 의하여 팽배해진 기준이 반드시 정답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만약 재평가로 치부해버리면, 당시의 평가가 옳고 무조건적인 정답으로 여겨질 여지가 있어서다. 나는 주관적 의견이 쌓이면서 대세가 되면 그게 객관적 기준으로 치환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시기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시간이 흘러 회자되는 과정에서 인정을 받는 것에 대해 재평가란 단어를 붙이는 게 맞는 걸까.


주체는 누구든지 될 수 있고, 시각은 다양하며, 기준에 정답은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사울 레이터의 작품을 두고 재평가라 말하지 않고, '새 평가' 그리고 '새 감상' 정도로 표현하고 싶다. 그는 어떤 대단한 작품을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평단의 평가가 목표고 목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는 대단한 철학은 없다. 카메라가 있을 뿐"이라는 그의 말에서,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그의 철학 아닌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저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고, 뉴욕 거리를 활보하며 좋아하는 피사체를 찍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비와 눈이라는 날씨 특성뿐만 아니라 피사체를 담아낼 때 특정한 무엇을 관통한 것들이 많다. 차창을 비롯하여 가게의 유리, 우산 등이다. 시점에 시점을, 시각에 시각을, 관점에 관점을 더하는 방식이다. 사울 레이터는 자신이 사진을 찍던 장소와 그 순간으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을 옮겨 놓는다. 일종의 초대인 셈이다.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컨대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뉴욕의 한 식당이나 커피숍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고, 차 안에서 차창을 통해 눈이 오는 것을 바라보는 주체가 나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 깊이 파고들고, 빠져들게 되는 듯하다. 이 같은 관점에서 나는 박준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으면서 때때로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는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힘들었던 시기에 박준의 글이 위로가 되어주었고, 위안을 건네주었다.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주는 것만 같았다. 박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와 산문은 관조를 통해 탄생하게 되고, 저자의 관조가 글을 읽는 이에게 투영되어야 비로소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물론, 그런 글을 쓰기엔 내 역량이 부족한 만큼,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평생을 노력해도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레이터가 묵묵히 자신만의 사진을 프레임에 담아낸 것처럼, 백지에 나만의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사람이고 싶다. 이러한 마음이 어쩌면 그가 사진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건네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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