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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Feb 20. 2023

때로는 불편한 마음도 묻어둘 줄 알아야 빛이 난다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면서...

이제 겨우 두 편에 글을 발행하고,  내 서랍에는 아직도 끝을 내지 못한 몇 편에 글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글들을 수정하다 문득 이 부분은 써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개인적인 일들이라면 나의 결정아래 적정선에서 써 내려갈 수 있겠지만 나 아닌 경우 가족일지라도 본인에 이야기가 쓰이는 것에 불편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비밀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비밀로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 의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내뱉어지는 순간 밤낮없이 돌아가는 미디어의 영향아래 삽시간에 퍼져나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희야 : 내가 좀 당신이 원하지 않는 부분일 수도 있는데 괜찮을까요?

남편 : 왜 내 욕을 얼마나 했길래.

희야 : 아니 그건 아니고요 ㅎ.

어머니 관련 일인데 당신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만약 내키지 않으면 다시 쓰려고요.

남편 : 아니 상관없어.

전혀 예상치 못한 쿨한 대답이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글들은 걸려 넘어질 것 같은 돌부리처럼 울퉁불퉁하고 질서 없이 제멋대로다. 더구나 이 부분을 만약 당사자들이 보았을 때 불편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겠다 싶으면 최대한 잘 포장된 신작로로 만들어 보겠지만 중심 글감이 되는 경우 모두 들어내야 하므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번 그것도 지치고 지쳐 갱년기에 극을 달리고 있던 그 시점에 내 마음속에 쌓여 있던 결코 하지 말았어야 했을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말았다. 더구나 주위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나를 위해 이제 참지 말고 하고 싶은 말 하고 살아야지 병 된다는 그 위로는 쓰잘 때기 없는 불에 기름까지 부은 꼴이었다. 그 결과로 그동안 참으며 지켜왔던 모든 것들이 처참히 무너져 내렸고, 오히려 천하에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게 되면서 시누이들께 보낸 문자 때문이다. 이 문자를 보내기 전 신누이들과는 무척이나 돈독한 관계였다. 7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30여 년이 넘도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에 항상 고마워했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착한 며느리증후군에 걸려 참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래야 하는 것으로 살아왔건만 그때 쓴 문자들을 다시 보면서 "미쳤구나" 무슨 용기로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동안 잘도 참아왔던 서운함들을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써서 보냈을까. 그 문자 내용을 왜 저장해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이렇게 다시 꺼내보게 될 줄이야.




"어렵게 돌려서 말 안 하고 뒤늦게 생색 좀 낼게요. 어쩌다 보니 숨 참으며 목욕시켜 드리고 치질까지 있는데 다리 아프다고 뒷물 한번 안 하시어 똥오줌 범벅된 속옷을 빨아댄 것이 6~7년이 되었네요. 가끔은 너무 힘들어 말이라도 해볼라치면 못 들은 채로 일관하거나 무슨 생색이냐는 눈초리에 그래 내가 참아야지.  다들 살기 바쁘다고 나이 드시고 움직임 불편하니 모셔다가 따뜻한 밥 한 끼 해주는 자식하나 없어도 나도 저렇게 늙겠지 싶어 입 다물고 살았네요.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어쩌면 누군가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왜 그런 헛된 부질없는 생각했을까요 한심하게도. 어느 한 사람만 군소리 없이 똥오줌 싸서 장롱 속에 넣어두고 서랍 속에 쳐 박아 두어도 그래 당신은 환자이니 내가 참아야지 말없이 몽땅 꺼내서 세탁기 돌리고 서랍에 넣지 말고 젖으면 내놓으시라고 하니, 깨끗해서 빨지 않아도 된다며 해맑게 웃으시는 어머니. 이제 내가 스스로 그만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이 집 식구로 사는 한 가시는 날까지 내 몫이라 생각했기에 누구에 동의가 의미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형제분들의 생각지 못했던 반응들로 그동안 함께한 30여 년 세월이 부정당한 것 같아 많이 서운했네요. 아니 너무너무 속상해서 펑펑 울었네요. 30여 년을 한집에서 부대끼다 보내는 나도 결정하기까지 쉽기만 했을까요. 이제 어머니나 내겐 새로운 시작입니다. 철철이 옷 챙겨다 드리고, 약 챙겨다 드리고, 요양원비 결재하러 다녀야 하니까요. 아무리 과정상 마음 상하고 서운하셨다 해도 고단하게 살아온 만큼은 아닐 것이니 모두 내려놓으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모두 털어버리고 어머니 뵈러 가려합니다. 자주 면회 부탁드립니다.(단 불편한 사항이 있으시면 주보호자인 제게 먼저 말씀해 주시면 개선될 수 있도록 전달하겠습니다. 형제분들이 많다고 그쪽에서 부탁한 내용입니다)"




5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지금 다시 보니 이것은 커다란 반란(?)이었고 뭐가 그리 급하다고 숨도 안 쉬고 앞뒤 없이 길게도 퍼부었을까. 이 문자로 인해 모두의 관계는 잠시 불편해졌었고 큰 시누이와는 지금도 멀어진 채로 이다. 나머지 형제들 속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현재 겉으로는 서로 안부 챙기며 잘 지내고 있다. 다만 지난날 내가 저지른 불량문자폭탄이 적절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속이 후련했을지 몰라도 결국 힘든 시간은 지나갈 것이고. 좀 더 인내했더라면, 좀 더 고민하고 영리하게 대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며칠 전 둘째 시누이가  만성위염으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이 걱정이라며 샛노란 알배기 배추로 대추, 잣까지 넣어 정성스럽게 물김치를 담가다 주셨다. 형님도 몸이 불편하시면서 나를 생각해 주신 그 마음이 어찌나 감사하던지 눈물이 날뻔했다. 물론 솔직함이 다양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불편한 마음이 있을지라도 묻어둘 줄 알아야 끝까지 빛이 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때의 나도 사랑하고 지금의 나도 사랑한다.

2023년 2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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