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만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든든하고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라고 했다. 나 자신과도 같은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이해해 줄 수 있고, 언제든지 망설이지 않고 마음을내어줄 수 있는 정도의 절친이 서너 명 있다. 오늘은 그 친구들에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친구는그간 살아오면서 얻은 빛나는 보석이며,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오랜만에 그중에 한 명인 순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골에서 초. 중을 함께 나온 옆동네에 사는 순이는 6학년 때 한 반이 되면서 짧고 굵게 친해진 친구이다. 거의 매일 같이 붙어 다니며, 하굣길에는 순이네 집에 들러 자주 밥을 먹고 오곤 했다. 형편이 조금 나았던 순이네 하얀 쌀밥과 정갈한 음식이 참 맛있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면서 같은 여중임에도 자주 만나지를 못했다. 어쩌다 만나도 서로 데면데면 지내다 각자 고등학교를 가며 잊히고 있었다.
어느 가을날 중국어를 배우러 가기 위해 가파른 언덕길을 끙끙대며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사를 와서 아는 사람도 없는 이 도시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걸까 하며 돌아봐도 낯익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나야 순이' 하며 얼굴을 들이미는 그녀와 나는,중년이 되어 우연히 길바닥에서 만났다. 그렇게 다시 만난 우리는 오늘처럼 가끔씩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한다. 숨길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시골동네에 살았기에,우리들의 대화는 언제나 거침이 없고 솔직하므로 만나고 와도 늘 개운하다.
오늘은 며칠 있으면 있을 내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친구가 마련한 자리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순이네였지만 그래도 넉넉한 살림에 부지런하신 어머니 혼자 힘으로 삼 남매를 잘 키워내셨다. 하지만 막내로 태어난 딸을 특히 애지중지 키우셔서인지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어린 날의 마음 착한 나는 친구가 하자는 대로 모두 따라주었었다. 지나고 보니 우리가 친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이유였던 것같았다.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이사를 한다며 도와주었으면 했다. 모두 포장이사를 하기에 정리나 조금 도와주면 되겠지 싶어 흔쾌히 대답을 했다. 하지만 용달차로 실어온 이삿짐은 친구가 아닌 이삿짐센터인부가 되어 시켜준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저녁 무렵까지 모든 짐을 나르고 정리해 주어야 했다. 하면서도 이게 뭐지 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그 많은 짐 속에 차마 친구 혼자 두고 올 수 없어 허리가 뽀사지도록 다 해주고 왔다. 아직도 초등학교시절 가난하고 순진했던 나로 생각했나 보다. 그 뒤로 마음의거리를 두었다.
몇 개월이 흘렀을까.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야채죽과 된장찌개가 먹고 싶으니 맵지 않게 끓여달라는 부탁이다.뜬금없이 뭔 소린가 싶었지만 그래도 순이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그 쌀밥에 비할까 싶어 정성을 담아 한 상 차렸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는 바짝 마른 친구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위암수술을 하고 회복 중이란다. 본인도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수술까지 하고 혼자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마저 위암으로 일찍 돌아가셨기에 오빠들뿐인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별것도 아닌 된장찌개와 야채죽을 물김치와 함께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내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친구와 운전 면하도 같이 취득하고, 같은 직장에서 일하며서로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다. 나보다 훨씬 똘똘하고 영리한 친구였기에 우리 관계는 더 돈독해졌고, 속마음을 나누며 꾸밈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지난해까지도 일을 했던 친구는 이제야 모두 정리를 하고, 문화센터에서 이것저것 배우느라 나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딸아이가 결혼을 앞두고 틀어지는 바람에 한동안 마음앓이를 많이 했던 친구였는데, 다시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니 내일처럼 기쁘다.
친구란 그런 건가 보다. 섭섭했다가도 이해를 하게 되고, 안 좋은 일에 더 마음 써주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그런 사이. 위암수술을 하고 늘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내가 아프다니 더 걱정을 해주는 친구다. 안 먹혀도 먹어야 한다며 자꾸 내 앞으로 음식을 돌려놓는다. 우리가 얼마나 이렇게 만나서 멀리까지 마음껏 돌아다니며 맛난 것 먹겠느냐며, 몸에 좋다는 차를 홀짝이는 친구를 보니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래 이렇게 풍경 좋은 카페에 앉아 달달한 디저트에 차 한잔 나누는 우리는진정한 친구 아인가!오래도록 건강하게아름답게살아가는이야기들로 곱게곱게 물들이며 예쁘게 살아가자꾸나. 오늘에 석양이 유난히 붉고 아름답다. 조금씩 물들어가는 너와 나에 모습도 그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