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엄마의 삶을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by 희야 ㅡ 박상희

중환자실에서의 투병생활은 엄마를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의식마저 희미해져 가는 엄마에게 또 다른 병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계속 떨어지지 않는 염증수치로 인해 항생제 치료는 계속되었고, 다행히 염증수치가 낮아져 이번에도 잘 고비를 넘기시나 싶었다, 그런데 검사 결과 항생제 내균성(MRSA) 감염으로 격리조치를 하게 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언니와 나는 그렇게 고단한 세월을 살아온 것도 모자라 마지막까지 고생하는 엄마의 삶이 안쓰러워 밤늦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숨죽여 울어야 했다. 그 속상한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담당의사는 20일 전에 찍은 폐사진보다 상태가 호전되었으니, 요양병원으로 옮겼으면 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44일 만이다.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더 이상 항생제 내균성이 치료도 되지 않은 엄마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지 않아서 계속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간호사님은 꼭 가란 것은 아니지만,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어서 응급실에 있는 환자가 못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옮기라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원했던 요양병원에 전화를 했다. 그곳에서는 항생제 내균성이 있는 상태에서는 받을 수 없다 하여, 격리병동이 있는 요양병원을 찾아서 또다시 입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래저래 엄마의지와 상관없이 또 끌고 낯선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미안하고 속상했다.


병원비를 정산하고 요양병원에서 보내온 구급차를 타고 이동하여 입원절차를 밟았다. 이미 한번 해봤던 터라 병원관계자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주보호자로서 몇 가지 서류에 싸인을 하고, 마지막으로 엄마를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왔다. 이미 병원을 옮기면서 마음고생을 했기에, 이제 아~ 소리마저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냥 엄마가 가고 싶어 할 때 집으로 모시고 와서 편히 보내드렸어야 했나, 엄마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응급실을, 중환자실을 택한 것이 잘못한 것일까? 별의별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들이다.




모든 것이 넉넉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 엄마는 집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느라 참 많이도 고생했다. 어쩌다 집에 가면 할머니 방은 오물자국으로 뒤덮여 있었고, 저년이 나를 굶기고 밥을 안 준다고 온갖 욕을 해대곤 했다. 그래도 엄마는 어떤 경우에도 싫은 소리 한번 안 하셨다. 그래서 나도 우리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싫은 소리 한번 안 했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훗날 아버지께서 그런 할머니를 두고, 먹고살기 위해 일을 나가야 했으므로, 할머니께서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도록 방문을 잠그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며 눈물지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렇게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재혼한 고모가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채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들어온 고모는 뭐가 그리 당당한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아이만 끌이고 앉아 엄마를 부려먹으며 집안에 분란을 일으켰다. 그런 고모를 할머니는 불쌍한 막내딸이라고 감싸고돌며 엄마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모가 작은 체구에 말대꾸 한마디 할 줄 모르던 엄마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난 그때 어린 나이임에도 고모에 머리채를 한 움큼 잡고, 고모가 뭔데 왜 우리 엄마를 괴롭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있다.


몇 년을 그렇게 지내다 어찌어찌해서 우리 집에서 나가게 되었고, 고모는 작은 구멍가게를 하며 아들을 키우며 살다가 60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고모도 참 박복한 인생이다. 아버지께서도 나중에 알게 되셨지만 술만 안 드시면 착하디 착한 분이셨던 고모부는, 고모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우리 집 주변을 맴돌며 사시다가 객사를 하셨다고 한다. 결국 고모부의 가족이라곤 고모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아들 밖에 없었으므로, 아버지께서 거두어 장례를 치러 주셨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나와 동갑인 막내시누이는 나도 임신을 했는데 본인이 입덧이 심하다고 친정에 와서 며칠씩 있다가 가지를 않나. 걸핏하면 남편과 대판 싸우고 사네 못 사네 하며 우리를 불러대곤 했다. 결국은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함께 살면서 겪었던 일들은 그런 드라마도 본 적이 없기에 차마 글로 다 쓸 수가 없다. 역시 시누이 남편의 마지막도 평탄치 못했지만, 현재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조카와 시누이를 위해 여기까지만 쓰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 일은 지금도 많이 서운하고 속상했기 때문에 잊히지 않는다.


첫딸을 낳았을 때는 시어머니께서 삼칠일동안 미역국을 끓여주셔서 몸조리를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구는 많고 생활비는 쪼들리고, 나는 출산비라도 아끼려고 집 가까운 작은 산부인과에서 두 번째로 아들을 낳고 몇 시간 만에 걸어서 퇴원을 했다. 그런 며느리 맡에 앉은 두모녀는 옛날에는 애 낳고 밭에 나가 일했다는 둥 도저히 가시방석 같아 누워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내 복에 뭔 놈에 산후조리인가 싶어 아픈 몸 뒤로 하고 출산흔적이 남아 있는 옷들을 주물러 빨어서 널고, 부엌에 들어가 넘친 국물들로 엉망이 된 가스레인지를 닦아내며 설거지를 했었다.





어쨌든 엄마는 그 시절을 잘 견뎌냈고 나 또한 흘러간 지난날일 뿐이다. 한때는 참고만 사는 엄마가 답답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모든 시간을 채워왔던 엄마의 삶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 또한 지난 시간들, 그 시간에 머물렀던 사람들 모두에게 함께 해서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지금 내가 별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기에 감사하다고...

그리고 숱한 비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에 길을 걸어온 엄마를 그 삶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