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마지막 분기가 시작되었다. 익어가는 가을답게 작품에도 가을을 담았다. 투명통에 담을 나뭇잎을 주우려 가로수 길을 걸었다. 스치는 바람이 낙엽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야릿한 냄새를 실어오고, 코를 벌름거리며 포로록 떨어지는 가을잎사귀를 살그머니 손바닥 안에 올려본다. 봄, 여름을 지나 고운 단풍으로 제 몸을 태우며, 긴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을 위해 미련 없이 작별을 고하는 나뭇잎에서 겸손을 배운다.
분명 새순을 튀우고 애지중지 초록빛 잎으로 몸집을 키우며 나무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느라 고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라는 동안 아낌없이 수분을 나누어준 나무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주변에 고요히 내려앉아 깊어진 겨울날 함박눈이 아무리 쌓여도 견딜 수 있는 따스한 이불이 되어주겠지.
계절은 기다림이다. 결코 서두르는 일 없이 때가 되어야만 잎을 피우고 떨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글씨를 잘 쓰고 싶어도 하루아침에 명필가가 되기란 싶지 않다. 더구나 글씨엔 젬병인지라 연습을 해도 될 둥 말똥 하건만 화요일 하루 부랴부랴 도구들 챙겨 들고 가기도 바쁘니 뭘 바라랴.
그래도 마음 가다듬고 먹물을 살짝 찍어 급한 성질 꾹꾹 누르고 천천히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며 나뭇잎에 겸손을 담아본다. 쓰고 또 가끔씩이라도 쓰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은 글씨 써질 날 있겠지. 안되어도 어쩔 수 없고. '그리움이 피어나는 가을' 내 멋에 겨워 몇 자 쓰고는 얼굴이 단풍보다 더 붉어진다. 언제나 흉내라도 제대로 내어볼까나. 그래도 써보겠다고 시간반을 붓을 들고 앉아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요. 모든 생각들을 지워버리고 오직 붓끝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이유였으니 뮐더 욕심내겠나 싶다.
그나마도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기 일쑤지만 가방 들고 와서 앉아있는 이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니 그 결과가 어떠하든 탓하지 않는다. 더구나 오가는 길에 느긋하게 거리를 탐색하고 스쳐 지나는 인간군상들의 면면을 눈에 담으며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겠지 싶다. 조금은 대충이고, 가끔은 허술하고, 때로는 실수도 하며 사람 냄새나게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완벽! 완벽! 을 외치며 자신을 닦달해 대며 때로는 숨차게 달려온 시간들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왔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부속품 하나 잃어버린 사람처럼 헤벌레 넋 놓고 분주한 타인들을 바라보는 이 순간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은 없다. 지나온 어느 순간인가는 미친 듯이 달려들어 이루려 애썼고, 그리 해왔기에 선물 같은 오늘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결코 부족하지 않은 날들에 감사하며 축배라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이 시간에 소중함을 가득 담아서....
그대들의 오늘도 행복하소서!
202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