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도 좋으실까. 수없이 가방을 쌌다 풀었다 이 옷을 입었다 저 옷을 입었다 어린아이처럼 분주한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난다. 며칠 전부터 숙소와 열차표를 예매하고, 간식도 야무지게 준비했다. 다행스럽게도 어제와 달리 화창해진 날씨가 무척이나 반가운 아침이다. 마음 맞는 친구 셋이서 떠나는 부산여행,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설렐 지경이다. 간식을 골고루 담아 세 봉지를 만들고, 혹시 시장에라도 가면 맛있는 거 사드시라며 신사임당 님도 두 장 얹었다. 서둘러 이른 아침을 먹고 전철역 근처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와 캘리 가방을 메고 걸었다.
걷는 동안, 묵직한 가방을 메고 상기된 얼굴로 전철역 속으로 사라지던 모습을 보며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올라왔다. 서울에서 지방까지 20여 년 동안 새벽밥 한술 뜨고 추운 날 더운 날 가릴새 없이 부모, 처자식, 동생들까지 건사하느라 자신의 삶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변변한 옷가지도 없이 늘 같은 옷 몇 벌로 견뎌내며 주머니는 늘 곤궁하기만 했다. 결국 막냇동생까지 결혼을 시키고 나서야 직장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여 33년이라는 세월을 한 직장에서 일하다 명예롭게 퇴직한 지도 벌써 10여 년이 되어간다.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는 강직함으로 온 식구들은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지만, 올곧은 성정 탓에 맡은 일이라면 틀림없이 해내고,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비상상황이 아닌 이상 야근을 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하니 제대로 된 여행마저 가본 적 없었기에 퇴직 무렵이 되어서야 여권을 만들었다. 그제야 봇물이 터진 것처럼 여러 나라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간 해보지 못했던 취미생활도 하며 소원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에 요즘은 더욱 활기가 넘치신다. 자주 마음 맞는 친구 몇 분과 인근에서 식사도 하고 멀지 않은 곳으로 계절먹거리를 찾아 다녀오기도 했지만, 오늘처럼 숙소까지 정하고 떠나는 것은 처음이다.
어느새 머리는 희어져 가고, 먹어야 하는 약의 갯 수는 늘어가지만 걸을 수 있을 때 어디든 가라며 아낌없이 응원해 준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찬바람 맞으며 달려가던 그 뒷모습이 왜 그리 짠하게 다가오던지. 혹여 혼자 자려면 추울세라 온도를 높여라, 혼자라고 밥 굶지 말고 챙겨 먹어라, 어린아이 두고 가는 것처럼 걱정스러운 말들이 길기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걷다 보니 캘리강좌가 있는 방앞에 도착했다.
스미는 바람이 차갑기만 한 밖과 달리 따뜻한 방에는 벌써 몇 분이 와 계셨고, 아주 오랜만에 도란도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몇 번 뵌 듯싶은데 오신 지 몇 개월 안 되었지만 또 다른 것이 궁금하여 이번 분기로 그만하겠다고 하셨다. 나 역시 그만할 생각이었지만 왜 그만하시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던 차 시원스럽게 본인은 75세라 이제 갈 날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며 그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다른 것을 배우고 싶다 하셨다. 연세에 비해 고우시고 옅은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긍정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참 즐겁게 사시는 것 같아요. 너무 좋아 보이십니다. 립서비스가 아닌 진심 어린 말들이 오가며 순간 화기애애한 캘리시간이 되었다. 나도 덩달아 말을 보태며 훈훈함 속에서 붓을 들었다. 오늘따라 흐르는 잔잔한 음악에 마음도 차분해지며 캘리를 해보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분기를 끝으로 그만한다 해도 아쉽지가 않다. 언제든 기회가 되면 다시 할 수도 있고, 저분의 말씀처럼 해보고 싶은 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동안 배운 글씨들을 한 장 한 장 가득 채워가며 시간반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조금만 서두른다 싶으면 쓰인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고, 좀 더 차분하게 여유를 가지고 쓰면 편안한 글씨로 다가온다. 이렇게 작은 붓놀림 하나에도 그 사람 마음이 담기거늘 작은 행동. 사소한 말 하나에도 상대방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고 배려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서로에게 행복한 말들로 포근한 마음들을 전해주며 따뜻하게 살아가야겠다. 그러지 않아도 추워지는 날씨에 시린 마음들이 올라올진대,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함께 행복하고 따뜻한 겨울이고 싶다는 생각에 젖어드는, 11월 끝자락의 캘리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