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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Dec 28. 2023

성조숙증이 대체 뭣이라고

새해의 약속

한동안 몹시 힘들었습니다. 남자아이 둘을 돌보다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도 달래 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한고비씩 넘기곤 했지만, 어느 순간 내가 왜! 뭐가 아쉬워 이 짓을 하고 있나 싶어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본인이 선택했음에도 겨우 3학년 꼬맹이 앞에서 남도 아니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손자이거늘 이렇게 쉽게 무너지나 싶어 몇 날을 우울감으로 채웠습니다.


물론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분명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막상 불쑥 소리를 지르며 뭐든 안 하겠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때면 가슴이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지금은 많이 유해졌지만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분출해 대는 그 호통을 견뎌내는 일은 수십 년을 함께 했어도 이골이 나지 못했나 봅니다. 겨우 어린 손자 앞에서 휘청이다니 그런 나 자신이 없이 유약하게만 느껴집니다. 늘 강해야 한다고 외쳐대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니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 있을까요.




윤이는 태어날 때부터 크게 태어났고 지금까지도 키, 몸무게가 상위 퍼센트에 속합니다. 그렇다고 딸이나 사위가 덩치가 좋은 것도 아니고 그저 평균 수준입니다. 단지 윤이는 고기를 무척 좋아하고, 우유도 벌컥벌컥 잘 마시며 태권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별문제 없이 잘 크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약간 배가 나오고 가슴이 넓어지며 그렇게 온순했던 성격이 갑자기 돌변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것이 반복되어 가까운 병원을 찾았고 대학병원을 가보라는 권유에 따라 검사를 했습니다.


제발 크는 과정에 잠시 스쳐가는 일이었으면 했지만 "성조숙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말았습니다. 성조숙증은 사춘기가 정상보다 너무 빠르게 시작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성조숙증에서는 원인을 찾을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여아는 만 8세 이전에 젖멍울이 생기거나 만 9.5세 이전에 초경이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남아는 만 9세 이전에 고환이 커지고 성장이 또래에 비해 매우 빠르거나 뼈 나이가 1년 이상 앞서는 경우 신체진찰과 피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대학병원 '성조숙증 이야기' 참조)


전문적인 내용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소아내분비 전문의의 진찰이 꼭 필요하며 그 결과에 따라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앞으로 3년 동안 4주마다 맞는 주사치료를 시작하고 MRI검사를 의뢰한 상태입니다. 이 치료는 너무 빠른 사춘기 발달을 또래와 비슷하게 맞추고  정신적, 사회적 스트레스를 줄여줄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 예고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신경질적인 행동도 점차 사라진다 하니 기다릴 수밖에요.


무엇보다도 그동안 본인은 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급작스런 변화로 인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시기에 윤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윤이의 목소리는 모두가 이유가 있었거늘  안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그 상황이 다시 반복되면 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헤매곤 합니다. 연휴를 보내며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지만 우선 음식에도 좀 더 신경을 쓰고.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해보기로 했습니다.




새해의 약속

하루아침에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 우리 함께 노력해 보자며 종이를 펼치고 본인이 알아서 쓰도록 했습니다. 할머니가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 1번으로 영어학원 안 간다고 떼부리지 않기를 썼습니다. 웃음이 나더라고요. 분명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 쳐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약속을 했으니 잘 지킬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2번은 골고루 잘 먹기는 제가 제안했습니다. 지금도 잘 먹어 주지만 워낙 과자종류를 좋아하고 색다른 음식을 손대려 하지 않을 때가 있어 어려움이 있거든요. 3번 역시 윤이가 결정하고 사인까지 했습니다. 추가로 책 읽기까지 했지만 다 지켜지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써서 붙여놓으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커다란 욕심 없습니다. 두 꼬맹이들이 그저 평범하게 남들 크는 것처럼 무탈하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그깟 성조숙증이 대체 뭣이라고 윤이와 할머니 앞에서는 별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릴 작정입니다. 물론 치료도 열심히 하고 균형 잡힌 식사와 운동을 하며 잘 이겨낼 입니다. 우리 윤이도 잘 해낼 것이라 믿습니다. '할머니 하늘이 참 예뻐요' 하며 감성이 가득했던 윤이를 어찌 힘들게 놓아두겠어요. 따스하게 안아주고 함께 길을 찾으며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응원해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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