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져 가는 오월. 어디를 봐도 싱그러움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아파트 현관입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늘 같은 자리에서 서 있을 뿐인데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잎이 나고,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들어 잎을 떨구며 나목이 된다. 벚꽃나무는 그저 서 있었을 뿐인데 그리 되었을까.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드물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며 온 힘을 다해 양분을 채우고, 가지 뻗어 햇살을 모으고 바람결에 이슬 머금으며 하루도 쉬지 않은 날이 없었다. 게으름은사의 세계요. 부지런함만이 푸른 생명의 증표처럼 이 봄날 저 프레임 안에 찬란하게 서 있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꽃이 먼저 피든 잎이 피든 태어남과 동시에 한 인간의 인생은 시작된다. 세상을 알기 위해 온몸으로 쉬지 않고 움직이며 탐색의 시간을 갖는다. 그 길에는 온갖 고난의 시간들이 함께 하지만 어떻게든 지나쳐 왔다. 계절이 가듯이 한 계절 한 계절을 올라서며 청춘을 노래하고 열정 가득한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가장 왕성한 근력으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처럼 질주하기도 했었다. 그러하다고 모든 내면의 세계까지 성숙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세월이 필요했다. 늘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몸을 쉬지 않는다. 고인 물이 맑지 못하듯이 멈춤이 곧 퇴보라도 되는 양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서둘러 생각회로를 작동시킨다. 오전 내내 그동안 미뤄온 화분정리를 했다. 작은 화분에 심어져 있던 다육이들을 큰 화분으로 옮겨 옹기종기 한가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몇 년을 키워도 크게 자라지 않은 것 같아도 어느새 곁뿌리로 싹을 옮기며 비좁다고 진즉부터 아우성이었다. 일상이 바빠지면서 식물들을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종류를 최소화시키고 이제 손이 덜 가는 식물들만이 베란다를 지키고 있다.
인생도 그러하다. 잎이 무성하고 꽃이 피고 화려했던 시절은 가기 마련이다. 조용히 내 안의 나를 만나며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의 시간들도 그러하기를 바라본다. 환갑의 나이를 보내며 쓴 공지영의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성씨가 다른 세 아이가 있는 공지영작가. 그 간에는 수많은 고통과 고난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결코 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아픈 결단을 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 거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 단지 그녀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일련의 사건들로 하동에서의 고독을 선택하며 동백이를 들였다. 꼭 그랬어야 했을까.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유기견센터든 구조기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본인이 나서서 부딪치며 동백이를 데려와야 했을까. 물론 동백이를 괴롭힌 그 주인이 옳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한발 물러서기를 바랐다.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또 택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제 조금은 다른 길을 가라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녀의 인생을 간섭(?)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연민에 가까운 마음이 그녀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싶었다. 그녀가 안다면 언짢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러고 싶었다.
나는 보수도진보도 아니다. 아니 모르고 살았다. 다만 돌아보니 보수일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결정된 것은 오직 내가 태어난 곳이 그랬고 가난이 전부였다. 시류에 따라 새마을운동의 수혜자(?)로 가난에서 조금씩 벗어나던 신세계 같았던 세월을 건너왔다. 누가 쓰러져가는 초가집을 슬레이트지붕으로, 샛길 같은 좁은 길을 신작로로 넓히고, 장마로 둑이 무너지고 물바다가 되자 헬기를 타고 그 외진 시골까지 와서 다리를 놓게 해 주었던가.모래밭으로 변했던 논밭은 다시금 옥토로 변했고, 휘청거리는 나무다리를 더 이상 곡예를 하듯이 숨죽이며 건너지 않아도 되었다. 튼튼한 시멘트 다리를 폴짝폴짝 뛰어서 건너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니 오빠들을 따라 새벽부터 일어나 잘 닦여진 길가에 꽃과 나무를 심고, 맨발로 걸어도 될 만큼 마르고 닳도록 쓸고 또 쓸었다. 그래야 부자가 되는 줄 알았다.의. 식. 주가 먼저였다. 먹고사는 것이 먼저였다. 부모님의 근심걱정거리가 줄어드는 것이 먼저였다. 세상에 일찍 눈귀가 트인 이들은 최루탄을 뚫고 거리로 나섰지만 이미 나의 세계 속에서는 그들을 이해할 여분이 없었다. 밥숟갈이라도 먹으며 학문의 길을 선택한 부르주아들이 복에 겨워 학업은 등진 채 부모가슴에 못 박는 철없는 아이들로 비칠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알지 못했던 세계의 장면들을 보고 들으며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제 그만 멈추었으면 좋겠다. 또다시 소수의 편에 서게 되는 일도 작가가 아닌 그 어떤 일로도 세간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옳은 말을 하고 올바른 사회가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처럼 곱게 다듬어져쓰여진 글들로 오직 책에서만 만나지기를 희망해 본다. 무교이다 보니 종교적인 색채로 인하여 모두 받아들이기는 무리였지만 그녀의 생각들을 오롯이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우리는 모두 저 나무처럼 가을이 오고 나목이 되어 길을 떠난다. 알 수 없는 세계로 홀로 떠나야 한다. 외로움은 영원히 지고 가야 하는 숙명이지 않을까. 이미 활화산처럼 들끓던격동의 시간들도 지나왔다. 이제 고요히 나를 들여다보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산과 들과 모든 자연과 함께 하며 묵묵히 저 프레임 속에서 피고 지는 나무처럼 그렇게살아가자. 그렇게 돌고 도는 것도우리네 인간의 삶이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