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동시에 살게 된 집은 마당 깊은 집이었어요. 좁은 골목길보다도 파란 대문을 열고 두 계단을 더 내려가야 작은 마당이 있고,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주방과 마루, 방이 있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도 오밀조밀 좁지만 있을 건 다 있었습니다. 심지어 작은 목욕탕 위에 장독대도 있어서 햇살이 춤추는 날에는 아이들의 기저귀를 새하얗게빨아서 널어두면 한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펄럭이다 개켜지곤 했지요. 분명 상수도였음에도 지하수처럼 시리도록 물이 차가웠고, 방도 냉한 기운이 감도는 탓에 선풍기가 무색했지요.
작은 마당이지만 여름이면 한쪽에색 바랜 파라솔이 달린 탁자를 펴고 국수를 삶아 먹곤 했습니다. 열무국수, 콩국수, 냉면, 쫄면등을 한 대접씩 비비고 말아서 참 많이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은 수돗가의 고무대야에는 참외, 수박등이 둥둥 떠다니고, 아이들은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알몸으로 뛰어다니며 한여름의 무더위 정도는 거뜬히 넘기곤 했지요. 비록 가진 것은 풍족하지 못했을지라도 소박한 꿈들이 끝도 없이 자라던 곳, 그 여름날의 행복했던 풍경들을 떠올리며 빙긋이 미소 지어 봅니다.
TV에서 어느 배우가 시뻘간 열무비빔국수를 볼이 미어지도록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옆에서 들으라는 듯 '아~ 먹고 싶다.'를 연발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침 꽤나 흘리시는 중인가 봅니다. 그것이 뭐 어려울까요. 마침 언니가 장마 전에 담그라며 열무와 갖가지 채소들을 한 박스나 택배로 보내왔어요. 혹여나 하루라도 더 지나면 싱싱함이 덜할까 싶어 감겨 오는 눈 부릅뜨고 밤으로 담가놓았지요. 아직도연하디 연한 열무김치가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며 입맛을 당기게 하니 주재료는 해결이 된 셈이지요.
열무국수는 별다른 재료가 필요치 않아요. 오이 한 줌을 채 썰고 양념장을 만들면 그만입니다. 양념장은 1인분으로 고추장 1스푼 반, 고춧가루 반스푼, 열무김치 국물 3스푼, 간 마늘 반스푼, 매실진액 1스푼, 참기름 반스푼을 넣어 골고루 섞어주었어요. 이제 국수와 계란만 삶으면 되겠지요. 알맞게 삶아진 국수에 준비한 양념을 부어주고 열무김치와 채 썬 오이도 듬뿍 넣어 골고루 비벼줍니다. 마지막으로 깨소금과 계란을 올려주면 열무비빔국수 완성입니다. 부족한 간은 소금으로 조절해 주세요. 맵찔이인 제가 먹을 열무국수도 한 그릇 만들었어요. 맛있어 보이나요(없어진 계란 반쪽은 중간에제가 살짝먹어버렸어요 ㅎ).
휴가철이 되면 떠오르곤 합니다. 아이들은 자라고 여름이 되면 어디든 데리고 가고 싶은데 휴가라는 것을 가본 적이 없어서 난감했지요. 다행히 대전에 계시는 큰 시누이께서 계곡으로 놀러 가자며 불러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모두들 형편이 넉넉지 못하여 기차를 타고 어린아이들 옷가방에 여벌옷 간단히 싸들고 갔지요. 형님은 작은 구멍가게를 하시면서 낡은 트럭을 끌고 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는데,그 트럭이 피서철에는 우리들의 고마운 발이 되어 호사를 누렸지요. 형님께서 준비한 음식들과 평상까지 그 트럭에 싣고 물 맑은 계곡으로 달려가 다슬기도 잡고, 아이들과 물장구도 치며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벌게지도록 놀다 오곤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대로할 줄 아는 것이 없었기에 옆에서 거들뿐이었는데 형님은 언제나 뚝딱 먹음직스러운 찌개를 대형 코펠에 가득 끓여내시곤 하셨습니다. 그런 맛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평상에서먹었던 그날의 감자참치찌개를 만들어 볼게요. 감자 3개를 깍둑썰기로 썰어주시고, 양파 1개와 호박, 두부도 같은 크기로 잘라주고, 참치 1캔(100g)과 파, 마늘을 준비합니다. 먼저참치캔을조금만 따서 냄비에기름을 붓고 자른 양파, 감자, 호박을 부서지지 않게 코팅하듯 볶아주었어요. 살짝 익었다 싶을 때 고추장 한 스푼을 넣어 간이 배도록 뒤적이다 집된장 2스푼을 쌀뜨물 5컵(750리터))에 걸러서 넣어줍니다.
감자가 거의 익어갈 즈음에는 참치와 두부 반모를 넣고 마늘과 대파를 넣어 끓여주면서 멸치액젓도 반스푼 넣고 후추로 마무리해 주면 감자참치찌개 완성입니다. 취향에 따라 고춧가루도더 넣어주시고, 가정마다 사용하는 장맛이 다르니 염도는 입맛에 따라 가감해 주세요. 감자와 호박의 구수한 맛이 다른 재료들과 어우러져 비 오는 날 먹기 딱 좋습니다. 별다른 반찬 없이도 그 찌개하나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건만 언제 준비하셨는지 맛깔스러운 밑반찬들이 돗자리 가득 차려지곤 해서 물놀이로 고파진 배를 허겁지겁 채웠던 철없던 새댁시절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형님 환갑에는 우리 부부가 부산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여 편안하게 모시고 다녀왔었는데 지금은 칠십 중반이 되어 건강도 안 좋아지시니 안쓰럽네요. 오늘은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겠어요. 그때 그 찌개가 환상적으로 맛있었다고, 감사했다고요.
마당 깊은 집에서 해 먹었던 콩국수를 해볼 건데요. 주말마다 찾아오는 그 많은 식구들이 부담 없이 다 함께 푸짐하게 해 먹을 수 있는 것이 콩국수였습니다. 시골친정에서 가져온 노란 메주콩이나서리태콩을 삶아서 맷돌에 갈다가 나중에는 믹서기로 갈아서 한 양푼을 만들어 면자루에 담아 있는 힘을 다해 눌러주면 고소하고 진한 콩국물이 쏟아졌는데요. 삶은 국수에 콩물 부어주고 소금 간을 해주면 그만이었으니 여러 반찬 없이 김치 한 가지면 족하기에 자주 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그 시절을 이야기하며 제가 그럽니다. 아무래도 나는 그때 천사였거나 바보였을 거라고.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거든요.
서리태300g을 6시간정도 담갔다가 콩이 물에 잠기도록하여삶아줍니다. 금세 끓어 넘칠 수 있으니 자리를 꼭 지키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검은 물바다가 되어 일이 더 커져버려요. 끓기 시작하여 5분 정도 후 한 알을 먹어보니 고소하고 비린맛이 없어 소쿠리에 건져 찬물샤워해 주었어요.서리태는 겉은 검은색이지만 속이 파란색인데 간혹 노란 것이 있어요. 새들이 모두 제 것인 양 이 밭 저 밭 물고 드나들어 같은 콩을 심어도 그렇다네요. 잘 삶아진 콩을 믹서기에 물 5컵을 넣고 곱게 갈아 면자루에 한번 짜주고 다시 물 2컵을 넣고 갈아서 꼭 짜줍니다. 이 과정이 제일 번거롭긴 해도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과정이니 해야겠지요. 이때 생수는 미리 냉동실에 살짝 얼려두었다가 해주면 좋습니다. 이제 부드럽고 고소한 콩국물이 되면서 거친 콩비지만 남습니다.마지막으로 콩국물 1컵에 통깨(땅콩)를 3스푼 넣어 갈아서 섞어주면 훨씬 더 고소한 콩국물이 됩니다. 혹시 땅콩이 있으시다면 함께 갈아서 넣어주면 훨씬 더 고소하고 맛있습니다.
삶고 갈고 짜주고 번거롭긴 해도 그만큼 고소하고 맛있으니 한 번쯤 해 먹을 만해요. 이제 우리 밀면 1인분을끓는 물에 5분 정도 더 삶아서 얼음물에 헹궈 그릇에 담고 얼음 몇 조각과 콩물 2컵(400ml)을 붓고 고명으로 채 썬 오이와 빨간 방울토마토, 계란 반쪽과 깨소금 올려주면 마무리가 되는데요. 간은 취향껏 소금으로 맞춰주세요(콩국물이 파랗고 먹음직스러운데 사진발이 안 좋아 아쉽네요). 오랜만이어서인지 콩물이나 콩가루를 구매해서 먹은 것과는 비교불가 정말 고소하고 부드러우니 맛있습니다. 유난히 더운 여름 얼음 띄운 콩국수로 매미들의 긴긴 노랫소리와 함께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여름이면 휴가지로 또는 시골외가나 친가로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휴가. 갖가지 사연들이 많겠지만 그때 먹었던 음식들은 아무리 세월이흘러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큰 가마솥 가득 끓여주시던 어죽,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돼지뼈들을 푹 삶은 진한 국물에 소담스럽게 말아주시던 잔치국수, 잘 익은 열무김치에 고추장 얹어 비벼먹던 보리밥, 그 어느 것 하나 값나가는 것 없어도 마음은 늘 풍요롭고 행복이 가득했던 그 여름날.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하는 것이 오래도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질까요. 바로 가족입니다. 때로는 서로가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주는 가족의 그 끈끈함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록 서로에게 아픔이 되었던 순간들이 있었을지라도 가족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이 여름 함께하면서 조금이나마 가족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소박한 음식을 앞에 두고 너무 오래 상념에 젖어들었네요. 모두에게 좀 더 멋지고 맛있는 여름날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