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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Oct 12. 2024

시어머니께서 지켜낸 자리

꿈에도 그리던 큰딸을 만나던 날(24.6.16)

지난 어버이날에 옷을 사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늘 다니던 옷가게에 갔지만 마음에 드는 이 없었다. 누워만 계시기에 편하고 가볍고 시원한 옷을 사드리고 싶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한 옷가게에서 적당한 옷을 찾았다. 얇고 간편하니 시원한 인견에 넉넉한 고무줄바지. 좋아하시는 반짝이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가장 무난한 윗도리도 세트로 사 왔다.  


아무래도 사이즈가 클까 염려되어 입어보았다. 정말 편했다. 8부 기장에 사이즈도 적당, 어머니께 딱이었다. 아직까지 이런 바지(일명 몸빼바지 비슷한 헐렁한 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입은 것을 보면 더 좋아하실 것 같아 다음날 똑같은 바지를 사서 입고 요양원에 면회를 갔다.


가져간 옷을 받으시며 활짝 웃으시는 어머니, 며느리와 똑같은 바지를 품에 안으시며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 모습에 육십 중반의 나이임에도 철없는 아이처럼 초록빛이 물들어가는 요양원 뜰앞에서 빙그르르 돌며 재롱을 떨었다. 어머니께서 잠시라도 웃으실 수 있다면 뭔들 못할까. 백수를 앞둔 어머니께서 웃을 날도 많지 않은 세상, 그날만큼은 속없는 며느리가 되어 보기로 했다.




요양원 앞뜰에 차려진 음식들이 오늘따라 그득하다. 오신다는 말씀도 없이 큰 시누이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께서는 유난히 안 오는 자식들만을 골라 찾으시기도 했지만 매번 면회를 갈 때마다 큰 형님만을 찾으셨다. 네가 꿈에서도 보인다며 큰 자식 손을 잡고 울먹이셨다. 큰 형님께서도 오시고 싶으셨겠지만 당신 몸도 가누기 힘든 날들이었기에 멀리서 오실 수가 없었음을 어머니께서는 알지도 못하셨겠지만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큰 형님께서 암수술을 하시고 한동안 연락이 없을 때도 시간이 한참 지나 그래도 엄마인 어머니께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망설이고 망설이다 넌지시 알려드린 적이 있다. 하지만 혹시 놀라실까 염려했던 나의 생각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 애는 암에 걸리고 그런다니'가 다였다. 남 이야기하듯 하시는 말씀에 진즉에 오직 당신만이 먼저였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자식이 중병이었다는 사실 앞에서도 렇게 쿨하실 줄은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양원에 누워계시면서도 누가 오는지 안 오는지 하나하나 짚어내시며 당신의 보고픔만이 우선이기에 상대의 안위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시다. 오직 당신 자신만이 먼저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셨기에 흐릿해져 는 기억 속에서도 당당하게 당신만을 위한 삶을 이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세상을 뜨신 시작은 어머니께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어느 날 두고 온 어린 자식이 찾아왔음에도 매몰차게 돌려보냈다며 겉으로는 좋은 분 같으셔도 독한 양반이라고 흉보듯이 말씀하셨다. 어쩌면 그리 독하게 마음먹고 살아오셨기에 호적에도 없는 자리임에도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며 잘 버텨내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홀몸으로 어린 자식을 키워낼 길이 없었던 당신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기에 지켜야 했고, 그 어느 것도 당신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일 앞에서는 냉정하게 끊어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온 집안 식구들을 당신 마음대로 지아비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휘두르셨던 폭언과 폭력 앞에서도 오직 당신 안위를 위해 절절매며 그 모진 날들을 다 받아내셨을지도 모른다. 몇 년이나 투병생활을 하시면서도 그 불편함들이 모두 어머니 때문인 양 온갖 짜증과 아픔들을 식구들에게 전가하며 괴롭히다 가셨다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그런 시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는 모습에 부부간의 속정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부부만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다.




어느 날 갑자기 황망히 떠나셨음에 그것이 평생의 아픔이 되어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큰아들보다도 더 강건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오직 좋았던 일들만 기억하며 당신이 했던 그 보살핌을 자랑스러워하셨던 어머니. 서울로 와서 쪼그라든 살림에도 매일같이 중절모자에 새하얀 모시적삼, 백구두를 신고 다방을 드나드실 때도 그 품새를 당신 손으로 매만져드렸다며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식구들은 돈이 없어서 제대로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고 어렵게 사는데 쌈짓돈 움켜쥐고 당신 허세를 채우려 커피값으로 날리다니 그런 시아버지를 감싸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분을 지아비라고 받들어 모시며 영원한 종인 양 그 비위를 다 맞추며 살아오셨을까. 마땅히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 지켜야 할 자리는 오직 아버님 곁이라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머니께서 그 모진 세월견디어 낸 값진 선물이라 해야 할까. 아버님 떠나시고 7남매의 극진한 효심으로 당당하게 안방 차지하시고 부족함 없이 살아오셨다. 가끔은 부럽기도 했다. 환갑도 전에 며느리가 해주는 따스한 진지 드시며 노년을 편안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연로하여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계시지만 때 거르는 일 없이 찾아주는 자식들의 발길이 7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늘 자식처럼 안쓰럽고 애틋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24.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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