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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Oct 10. 2024

시집을 참 잘 온 것 같다

7남매가 7년 만에 드디어 완전체가 되었다(5월 8일)

24년에 맞는 어버이날이다. 어버이날이 되면 매년 형제들이 모두 모여 시끌벅적하게 식사를 하고 선물을 사드리곤 했다. 물론 자식들이 준 용돈으로 주머니도 두둑해지시고 세상에 둘도 없이 행복한 어머니셨다. 각자 가정 이루고 자식들 낳아 나름 잘 살아가고 있으니 걱정하실 일도 없었지만, 철저히 당신 위주의 삶이셨기에 크게 불편할 이유도 없었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드시며 흐릿해져 가는 기억 때문에 요양원에 가셨어도 어버이날만큼은 휠체어에 앉아서라도 외출을 했었다. 그때는 손주들까지 총출동하여 할머니를 더없이 기쁘게 해 드렸다.


하지만 크게 아프신 뒤로 생리현상마저 전혀 컨트롤이 되지 못하기도 했지만,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외출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혹여 외출했다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니 내 힘으로 어머니를 어떻게 해드릴 수도 없다. 그저 가져간 음식들을 먹여드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얼굴을 보여드리며 잠시라도 활짝 웃게 해 드리는 일이 전부였다. 오늘도 총명하셔서 우리 아이들 안부까지 물으며 보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시다. 모두 왔으면 좋겠지만 아직도 면회는 한 달에 한번 4인이니 손주들 차례까지 오기란 쉽지 않다.


둘째 시누이(형님이라 부름) 배려로 격월로 오다 보니 이번달은 형님 차례였지만 어버이날인 관계로 우리도 함께 면회를 갔다. 칠 남매나 되는데 매달 나 혼자 음식을 준비해서 면회를 갔더라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 몫이라 여겼을지라도 격월마다 면회를 가주시는 둘째 형님이 의지가 되고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 오늘도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음식들을 골고루 준비하시고 내게 줄 음식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그런 덕분에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생크림 카스텔라와 두고 드실 만한 간식과 예쁜 꽃무늬 양말만 준비했다.


다행히 오늘은 울지도 않으시고 그저 내 손을 잡고 행복해하셨다.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드시며 짧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다녀가면 마음이 놓인다. 한 달 후까지 보내는 시간들이 그리 조급해지지 않는다. 울지 않고 잘 참아주신 어머니. 준비해 간 카네이션꽃을 달고 활짝 웃으시는 어머니가 더없이 감사한 하루였다.




오늘은 면회가 끝나고 형님 내외분께 식사를 대접했다. 미리 풍경 좋은 한정식집을 예약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자식일지라도 안 해주면 그뿐, 모두 내 몫이거늘 늘 성심을 다해 주시는 형님께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사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두 손 무겁게 많이 받아왔다. 솜씨 좋은 형님께서 싸주신 보따리를 풀어보며 눈물이 나려 했다. 손수 만든 김부각에 마늘종장아찌에 양념깻잎까지 음식솜씨가 좋으시니 그 맛은 말해 무엇할까. 거기에다 형님께서 두고 드시려고 데쳐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부지깽이나물과 엄나무순까지 모두 챙겨 오셨다. 친정어머까지 안 계시다 보니 더 마음이 울컥했다.


며칠 전에 7년 만에 큰 시누이댁에도 다녀왔다. 연휴를 맞아 아이들이 미리 다녀가는 바람에 시간이 되어 대전에 계시는 형님댁 방문했다. 그간 사연이 많았다. 어머니께서 요양원에 가시면서 나와의 인연을 끊으셨던 형님은 지난해에 큰일을 겪으셨다. 갑작스레 쓰러지면서 대학병원에 실려가셨다. 그때 아무리 인연을  끊었을지라도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온 남동생을 매정하게 내치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남편과의 해후가 얼떨결에 이루어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큰 형님께 생신축하와 안부전화를 드릴 때면 남편의 성화에 나까지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되었다.


7년의 길고 긴 세월은 그렇게 아물어가며 드디어 7남매가 완전체가 되었다. 큰누이이기에 언제나 누구보다도 먼저 챙겨드렸었다.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신 걸 알기에 큰 수술을 하실 때마다 알바와 파트타임하며 어렵게 번돈이지만 망설임 없이 슬며시 드리곤 했다. 지난번에도 고민하는 남편에게 어차피 몇 년 만에 가는 거 넉넉하게 드리라며 두툼하게 챙겨 보냈다. 가족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가족이기에 세월의 간극이 주는 그 어색함도 쉬이 사라져 갔고 우후지실(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이라고 7남매의 형제애는 더 끈끈해져만 간다. 결국은 가족이기에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였다.


그럼에도 거리가 있다 보니 냉큼 가보지도 못하고 그동안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구나 지난 3월 친정어머니 소천 시 보내주신 위로에 짧게나마 감사인사만 드린 것도 마음에 걸리고, 왕래가 없는 사이 건강이 더 안 좋아지신 탓에 거동이 쉽지 않다 하시니 그 또한 마음이 쓰였다. 과일이라도 사려고 마트에 들렀다가 수박과 시장 보러 다니기 힘드신 형님을 위해 감자, 오이, 호박등 야채를 한 아름 사들고 갔다. 외출이 어려운 형님께서는 더없이 좋아하셨다. 몸이 불편하여 외식도 어려워 배달음식을 먹고 병원비에 보탬이 될까 싶어 조금이나마 드리고 왔다. 70대 중반도 안되신 형님이지만 몇 번의 큰 수술로 성한 곳이 없다며 집안에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애잔하다.


그렇게 가꾸시고 당당했던 형님이신데 계속되는 고통으로 얼굴이 수척해지신 모습에 눈가가 습해졌지만 애써 참고 왔다. 그럼에도 와줘서 너무 고맙다며 그 몸으로 냉장고, 냉동고에서 주섬주섬 꺼내어 이것저것 한 보따리 챙겨주셨다.  그때도 그 보따리를 풀어보면서 울컥했는데 나이 드신 두 형님이 나를 이렇게 감동시킨다. 나 아무래도 이 집에 시집을 잘 온 것 같다. 


2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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