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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Oct 08. 2024

어머니의 엄마가 되어줄게요

세 번째 자식이 된 시어머니

한집에서 복닥이며 시작한 지도 39년

큰아이가 27살에 결혼하여 떠났다.

아들도 30에 제짝 찾아 떠났다.


32년 되던 해 어머니마저 떠나셨다.

치매가 찾아오고 거동이 어려워

요양원에 가신지  7년


아들딸 모두 독립하여 잘 살아가지만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세 번째 자식 같은 시어머니로

눈물 마를 날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사시지 못할 거라며

요양원에서 짐을 내주었었다.

그러나 기적은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소생하여

다시 일상을 회복하며

정신이 맑아지시는 날이 많아졌다.


늘 정신이 혼탁하여 천진했던 어머니

그것이 안쓰러워 눈물지었는데

막상 맑아지니 그것이 더 아프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몇 번이나 의연히 버텨내시어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는데

앙상해져 가는 몰골이 마음을 헤집는다.


어머니!

지금처럼 이라도

어머니의 엄마가 될 터이니

우리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요.




요양원 면회를 다녀오고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우시던 어머니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직도 그런 날들을 보내고 계시면 어쩌지. 그렇게 보고 싶어 눈물 지으시는 날들이 많으면 또 몸이 축나실 텐데, 더 이상 빠질 것도 없는데 젖은 날들만 쌓여간다.


7년 세월 동안 내 마음은 참 많이도 널을 뛰었다. 아니 39년 세월이 모두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고마움과 안쓰러움과 원망과 한, 고단함, 온갖 연민들로 뒤섞여 종잡을 수 없는 세월이었다. 하지만 친정어머니 마저 내 곁을 떠나시고 일주기를 맞아 시골집에 다녀오며 많은 생각들을 했다. 그래, 이제 내게 남겨진 분은 어머니 한분뿐이다. 내 자식이라 여기며 가시기 전에 마음으로나마 자식처럼 더 많이 안아주고 보듬어 주자고.


그렇게 시어머니는 나의 세 번째 자식이 되었다. 




같은 동에 사시는 어르신께서 힘겹게 어르신용 보행기에 의지하며 걸어가셨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곱던 어르신께서 못  사이 너무도  달라진 모습에 어머니가 더 생각났다. 언제나 까맣게 염색된 파마머리에 곱게 화장을 하고, 단정한 의복차림에 늘 할아버지와 함께 다정스럽게 다니시곤 하셨는데. 그 모습은 간데없고 짧은 커트에 새하얗게 이슬이 내린 머리, 생기 잃은 낯빛이 아무래도 많이 아프신 것 같았다. 어머니도 그러셨다.


노인정에 가실 때마다 곱게 화장을 하고 목걸이, 반지를 끼고, 사다 드린 고운 팔찌까지 주렁주렁 걸고 차고 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눈이 더 나빠지면서 어쩔 수 없이 염색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언제나 스팽글이 달린 화려한 옷들을 사다 드리곤 했다. 그랬던 분이 치매가 오면서 제대로 씻지도 않고, 노인정에 가셨다가도 잠시 집을 못 찾아 헤매다 오시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같은 동 주민들께서 도와주셨는지 어머니께서 요양원에 가신 뒤 가끔 안부를 묻는 분들도 계셨다. 많이 안 좋아지신 뒤로는 그렇게 좋아하시던 노인정에도 못 가시고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시면서 어린아이처럼 꼭 센터차가 있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고 끝나면 다시 모시고 올라왔다.


아마도 그 어르신께서도 이런 과정을 겪어나가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에도 불편해 보이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보이지 않는다. 초품아(초등학교가 가까운 아파트)가 아니다 보니 타 아파트에 비해 조용하고 어르신들이 많이 살고 계신 편이다. 가끔 주간보호센터차가 오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주차장에는 차종(차종에 관심이 없어 잘 모름) 생소한 대형차들로 그득하고 대낮임에도 비어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프라이버시를 위해 그 흔한 거울조차도 없고, 아파트 환경에 좋지 않다며 알뜰장도 서지 않는다.


10년을 살고 떠나온 예전 아파트에서는 어머니께서 목요장날이면 묻지도 않는 며느리 자랑을 하시며 자식들이 준 용돈으로 드시고 싶은 것을 사 오곤 하셨다. 뒤늦게 퇴근길에 들리면 어머니께서 이미 다 사가셨다며 품목까지 알려주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가 참 좋았다. 어쩌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라치면 양푼에 썩썩 비벼 머리 맞대고 퍼먹기도 하고, 노인정에 뭐라도 가져다 드리면 우리 며느리가 최고라며 어찌나 자랑을 하시던지 부끄러워 서둘러 나오기 바빴다.


이제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와 함께 한 그 시간들은 더없이 평안하고 잔잔한 추억들로 그득하다. 친정어머니께 해보지 못했던 어리광이라도 피울라 치면 껄껄껄 웃으시며 딸들도 하지 않는 모습에 좋아라 하시곤 다. 같이 봉숭아물도 들이고, 찹쌀을 쪄서 인절미도 만들고, 김치도 담그고,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것 들이다. 왜 이제까지 그 생각을 못했을까.  혼자 잘나서 살아온 것처럼 어머니와의 흔적을 고 살았다. 그저 지금 당장 마음이 무겁고, 나만 아프다고만  거였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께서 아이처럼 울며 응석을 부려도 다 받아줄게요. 영화 원더래드에서는

"엄마! "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내 딸 하면 안 될까."라는 대사가 있다. 이 영화를 보며 참 많이 울었다. 어머니 다음 세상이 아닌 지금의 이 세상에서

이 며느리가 엄마가 되어줄게요. 오늘도 안한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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