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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Oct 03. 2024

시어머니 요양원비와 친정유산

삶의 끝은 누구도 모른다(24.3.20)

부모를 모신다는 것, 내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한 일임에도 아무리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개인에 따라서 드는 생각들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더구나 비용을 언급하기에는 어딘지 불효인 것 같고 죄를 짓는 기분이 들기도 하여 좀처럼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 비용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다. 요즈음 요양원비를 입금할 때마다 여러 감정이 밀려들곤 한다. 처음에는 5년 정도의 목돈을 따로 넣어두고 시작했었다. 중간중간 갑작스러운 위기로 입퇴원을 반복하였지만 그런대로 버텼고 5년이 지나 바닥을 이기 시작했다. 딱 5년이 되었을 즈음 어머니께서 생사의 기로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모두가 며칠을 못 넘기실 거라 했고, 어머니께서 요양원비 걱정하는 나를 위해 딱 그만큼만 다 가시나 싶어 죄송한 마음마저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께서는 기적같이 다시 소생하셨고 지금을 조심스럽게 살아내고 계시다. 하여 비어버린 통장은 반드시 워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침 몇 해 전 환갑에 받아서 한 푼도 쓰지 않고 아껴두었던 축하금으로 충당하며 한해 두 해를 넘길 수 있었다. 물론 어떻게든 다른 돈을 가져다 써도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쓸데없는 고집인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내 손 안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걱정하듯 형제들이 공동회비에서 준다는 것은 더더욱 싫어 거절했다. 있는 돈은 곶감 빼먹듯이 야금야금 매달 지불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내 감정은 수십 수만 가지 끝도 없이 널을 뛰었다. 그런 와중에 죽으란 법은 없는지 해결할 방법 또한 생겼다. 친정부모님께서 모두 떠나시며 얼마간의 유산을 남겨주셨다. 지금은 친정아버지 어머니께서 그렇게 못 먹으며 아끼고 아끼셨던 그 돈을 받아 시어머니 요양원비로 충당하고 있다.


아무 돈이면 어떠랴. 아마도 친정부모님께서는 오히려 잘했다고 말씀하실 게다. 우여곡절 끝에  요양원으로 모시며  마음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으면서도, 차마 힘들었다는 말은커녕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는 말조차 한동안 하지 못 했다. 매번 친정에 갈 때마다 사돈께서는 잘 계시느냐는 안부를 물어오셨지만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몇 해가 지나고 나서야 말씀을 드려야 했다. 친정어머니께서는 당신도 언젠가는 가야 할 곳이라는 것을 아셨는지 모르셨는지 눈시울을 붉히시며 한마디 하셨다. "좀 더 모시고 살지 그랬니" 말씀이 어찌나 서운하던지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단 한 번도 친정에 가서 나 힘들다, 어렵다 말한 적이 없기에 이 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시지도 못했지만 겉으로 만이라도 걱정 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효도생각했다.


친정에 갈 때면 가장 예쁜 옷을 입고 하이힐을 신고 곱상한 도시여자로 한껏 꾸미고는 어쩌다 동네분들이라도 마주치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뉘 집 둘째 딸임을 밝히곤 했다. 그것이 우리 부모님 면을 세워드리고 걱정시키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다.  후로도 요양원에서도 잘 계시다며 활짝 웃으시는 시어머니 사진을 보여드리며 친정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곤 했다. 친정어머니께서도 그 와중에 요양원에 가시게 되었고 내손으로 친정집에서 가깝고 형제들이 자주 갈 수 있는 곳으로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잘 적응하시지 못하셨고 병세마저 깊어져 응급실과 중환자실. 요양병원을 오가시다 먼 곳으로 급하게 떠나셨다.


친정어머니께서 잘 적응만 해주셨더라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현재 시어머니께서 계시는 요양원으로 모시고 와서 사돈끼리 외롭지 않게 지내도록 해드리고 싶었다. 물론 형제들의 허락이 필요했겠지만 그 방법도 두 분께 나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시도도 해보기 전에 친정어머니께서는 고생만 하시다 허망하게 먼저 가버리셨다. 분을 위해 좀 더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갈 때마다 해피하시고 아픈데도 없고 잘 있다며 자랑처럼 말씀하시는 시어머니. 그 누구의 삶도 그 끝은 알 수가 없다. 친정어머니께서 그렇게 짧게 고생만 하시다 가실 줄은 몰랐다. 그에 비해 몇 번의 고비에도 잘 이겨내시고 짧지 않은 세월 내 집처럼 와줘서 고맙다며 바쁠 텐데 어서 가라고 하시는 시어머니의 삶이 부럽기까지 다.




평생 일만 하시며 고생하시고, 마음껏 쉬어보신 적 없던 가엷은 친정어머니. 살가운 편도 아니신 데다 당장 살아내는 것이 버거워 집 떠난 딸까지 돌볼 겨를조차 없으셨을 거라 나만의 위로를 건네곤 한다. 그에 비해 오직 당신 인생을 위해 어린 자식마저 외면하고 이 집의 두 번째로 들어와 아들 없는 집에서 7남매를 낳으신 시어머니. 시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와 시골부잣집은 일부자라고 한시도 쉴 겨를 없이 끼니마다 머슴들 밥까지 가마솥으로 하나 가득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며 가끔 그 시절의 힘듦과 자랑을 섞어서 말씀하시곤 하셨다. 서울로 올라오며 가세는 기울었버젓이 함께 살고 있는 처를 호적에도 안 올려 나를 그렇게 고생시킨 밉기만 한 본인밖에 몰랐던 시아버지. 그런 시아버지의 병간호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지만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어린아이들을 맡기고 출근하는 며느리에게 "나는 평생 돈 벌어본 적은 없다"라며 랑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시집살이를 시키신 적도 크게 마음 상하거나 한 적도 없었다. 누가보아도 좋은 시어머니셨고 고부사이가 좋은 상냥한 며느리였다.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이 땅에 살아있음에도 언제 말소가 된 지도 모르는 호적을 만들어 드렸고, 없는 살림에 환갑에는 비취반지를 원하셔서 해드렸고, 칠순에는 그때만 해도 괜찮았던 경복궁에서 잔치를 해드리기 위해 혼자 계약을 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얼마나 울었던가. 언제나 당신이 우선순위였던 시어머니를 돌아볼 때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살길이 막막해 어린 아들을 두고 밥술깨나 먹는 집의 두 번째로 왔을 때는 그 정도의 각오는 있으셔다. 지금은 비록 요양원에 계시지만 늘 해피한 모습으로 지내시는  또한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적응하시며 잘 이어가고 계신 것 일수도 있다. 




알 수 없는 끝이 우리에게 때로는 오늘을 내일을 나만의 꿈을 담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잠시나마 막막함이 되기도 하고 오만가지 감정이 들게도 한다.  그래도 시간은 흐를 것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른다면 그래 오늘도 잘 살아내 보자. 시어머니께서도 그러실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기억들만 안고 살아가시니 여러 생각들을 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어머니께서 장수하시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40여 년의 수많은 나날들, 다음 달이면 또 만나서 어머니와 나만의 의미 있는 시간들 채워나갈 것이다.


어머니, 남은 유산 넉넉해요.

언제까지고 마음 편히 사세요! 


2024,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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