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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y 17. 2023

의사 차정숙보다 친절한 의사가 있었다.

의사 차정숙보다 더 멋진 내 딸

새벽잠을 설쳤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몇 날며칠 물속에서 끊임없이 자맥질을 해대는 오리처럼 그 생각은  늘 함께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준비를 하고 의뢰서, 소견서, 슬라이드 등을 미리 가방에 넣어 두었다. 지난번에 받은 내시경검사에서 암이네 아니네 한바탕 소동을 벌였었다. 우리에 바람만으로 선종이라 결론지으며 기다리다 예약한 대학병원에 갔다.


내가 아파서는 처음 가보는 대학병원이다. 남편이 40대 끝자락에 갑작스러운 심질환으로 응급실로 실려가는 바람에 갔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남편을 혼자 두고 어둠이 내려앉은 집으로 돌아왔었다. 행여 잘못될까 봐 무서워서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하염없이 울었다. 앞으로 아이들을 나 혼자서 어떻게 키우라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집으로 내쫓는 병원이 원망스럽기만 했었다.




대학병원에 근무했던 딸 덕분에 많은 혜택을 누렸다. 비싼 건강검진도 해주고 정기적인 검사도 직원혜택으로 반값만 지불했다. 지금은 어림없지만 원하는 날짜 원하는 시간에 적당히 끼워 맞춰져 외래를 보기도 했다. 접수를 하면 벌써 딸의 동료가 엄마인걸 확인하고 미소로 맞이하며 얼른 내 이름을 호명해 주었다. 딸은 내 건강을 챙겨주는 수호신이었다.


딸은 두 아이를 모두 그 병원에서 낳고 그만두었다. 직원이고 소속 간호사인 딸은 첫아이를 낳았을 때 높은 층 특실에서 누리는 혜택도 받았다. 사방이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값어치의 위력을 느끼게 했다. 물론 의사 차정숙에서 나오는 인턴이나 레지던트들보다도 더 힘든 간호사생활을 했다. 매일같이 걷기보다 뛰다시피 했으며, 밥도 제때 못 먹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도 못 가서 방광염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도 힘들게 일한 만큼 8년 동안 알차게 모아 결혼할 때는 차도 사고 방 얻는데 보태더니 집도 일찍 장만했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승승장구 승진을 하는 사위와 새로운 도전으로 간호직공무원에 합격하여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아끼고 절약하며 에코백을 들고 다니고, 아이들과 환경정화캠페인에 참여하여 쓰레기도 줍는다. 가끔 휴일이면 손자들을 내게 맡기고 부부가 헌혈을 하러 간다. 물론 헌혈하면 주는 도서상품권으로 책도 사고, 영화를 보고, 맛있는 간식을 받아오기도 한다.




의사 차정숙보다 더 멋진 내 딸이다. 딸자랑에 삼천포로 빠졌다. 아마도 이 글을 몇 장을 더 써도 나보다 나은 딸자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팔불출 이래도 어쩔 수 없다. 사실이니까(어깨 으쓱).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안내문자에 따라 소견서와 의뢰서를 등록하고 카드도 발급받아 소화기센터로 올라갔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내 차례가 되었다. 혹여 내가 놓치는 말이 있을까 봐 녹음설정도 하고 진료실을 들어갔다. 내 또래 되어 보이시는 의사 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옆에는 도와주시는 분도 계셨다. 몇 가지 도와주시는 분께 말씀을 하시더니 나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시고 옆방으로 가셨다.


담당의사 선생님은 1, 2번 방을 동시에 사용하시며 환자들은 앉아서  있고, 시간을 절약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의사 선생님께서 왔다 갔다 하시며 힘든 진료를 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진료 내내 차분하고 친절하게 내가 궁금해하는 내용들을 관련된 서류까지 찾아서 보여주시며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옆방으로 가신 후 도와주시는 분께 가져간 슬라이드를 드리고, 전에 먹던 약의 처방전도 드렸다. 언제부터 아팠고 등 여기까지 온 경로에 대해서도 간단히 말씀드렸다. 그분 또한 과거 병력이나 가족 병력등을 확인하고 현재 내 상태에 대해서 물으며 열심히 입력을 해주셨다. 먼저 간 병원에서 무용지물이었던 병력 브리핑 자료가 아쉬운 순간이었다.


나에 이야기들을 모두 입력하고 돕는 분도 옆방으로 이동하시고, 의사 선생님께서 진료를 마치시고 돌아오셨다. 이미 돕는 분께 말씀드렸지만 처음인 것처럼 불편한 곳을 물으며, 하나하나 모니터를 보고 확인하셨다. 앞으로의 치료절차와 당장 먹어야 하는 치료약도 처방해 주셨다. 아~ 세상에 이런 의사 선생님도 계시는구나. 의사 차정숙은 새발에 피다.




어쨌든 워낙 천천히 말씀을 해주셨기에 녹음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아뿔싸! 의사 선생님의 친절에 감동한 나머지 간호사님께서 채혈을 꼭 하고 가라는 말을 까맣게 잊고 집으로 왔다. 이 어이없는 실수는 어쩌란 말인가. 갈수록 태산이다. 잊을게 따로 있지. 어쩔 수 없이 다시 병원에 전화를 해서 이실직고를 했다. 내시경 하는 당일에 2시간 30분 전에만 하면 된다는 안내를 받고  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내상태는 전 병원에서 검사한 것처럼 위염과 장상피화생도 있고 작은 선종이 있는데 다시 내시경을 하면서 도려낼 수도 있고 조직검사만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경우 암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지만 검사를 해보아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며칠 전에 내가 검사했던 병원에서 오신 분도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검사해 보니 0.6센티의 암이 발견되어 바로 제거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경우의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차분한 말씀으로 별일 없을 것이라는 시그널을 보내시는 것 같아 안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이 세상에 오늘 만난 의사 선생님처럼 더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몸이 아픈 분들이 위로벋고 마음만이라도 행복하길 바라봅니다.

모두 건강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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