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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y 23. 2023

참깨를 볶고, 어머니의 추억도 볶는다..

어머니의 보물상자

타닥! 타닥!

참깨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끝없이 튀어 오를 듯이 난리도 아니다. 누가 높이높이 뛰어오르나 내기라도 하듯 사방으로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짜그락! 짜그락! 

지치지도 않고 뭐가 그리 좋다고 지들끼리 볶아대며 내 귀를 시끄럽게도 한다. 한바탕 소동을 피우던 깨들이 노릇노릇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면 참깨 볶기는 막을 내린다. 반듯이 한 꼬집 집어 비벼보아야 한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내 코를 감싸 안는다. 이것이 진정 음식에 찐 맛을 살려주는 국산참깨의 향기이다.


며칠 있으면 제사도 돌아오고, 마침 먹고 있던 참깨 통이 비어 가고 있어 볶았다. 곡식들을 PT병에 담아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장을 열면, 각자의 이름표를 달고 나에 택을 기다리고 있다.  PT병에 담아두면 한여름이 지나도 벌레걱정 없이 잘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은 살림에 작은 팁이다. '21년 어머니 참깨'라는 글이 쓰여 있는 참깨 통에 순간 마음이 멈춰진다.




어머니께서이미 당신이 참깨농사를 더 이상 짓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셨을까. 커다란 통에 미리 참깨를 많이도 담아 놓으셨다. 정신이 흐릿해져 가는 날들이 많아질 때마다 언니를 불러 자주 당부하셨다. 내가 가더라도 잊지 말고 꼭 이 참깨를 가져다가 볶아서 막냇동생 주고 너도 먹으라고.


어머니를 산자락 햇살 좋은 언덕에 모셔드리고, 49제가 되던 날 언니는 그 참깨통을 꺼내왔다. 참깨는 오래 두면 벌레가 날 수도 있고, 맛이 없다며 두 올케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것이니 언제든 집에 올 때 생각나면 막냇동생 조금 볶아다 주고 올케들도 먹었으면 좋겠다고. 올케들은 양도 많은데 한사코 딸도 주어야 한다며 내게도 적지 않은 양의 참깨를 나누어 주었다.




참깨를 볶을 때마다 생각이 나고, 참깨를 음식에 넣을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홀로 남겨진 자식걱정에 어찌 눈을 감으셨을까. 어머니가 참깨를 가득 담아놓았던 커다란 통은 어머니의 보물상자였다. 식구들이 모두 일하러 나가면 늘 비어있는 시골집에는 자물통이 없다. 결국 중요한 물건도, 가져갈만한 물건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보물이 있었다. 주머니는 비었을지언정 마음에 의지가 되는 금붙이가 있어 든든했다. 무슨 때마다 받은 목걸이며 팔지, 반지 등을 검은 봉지에 둘둘 말아 참깨통 깊숙이 묻어두셨다. 행여 남의 손을 탈까 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아주 몰래 숨겨둔 것이다.

그런 보물이 없어졌!




그때는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새로 지으셨던 집이 낡아서 전체적으로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신식으로 젊은 인테리어업자가 와서 마당에 정원도 만들고, 아담하고 예쁜 집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것만 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던 막내며느리가 그 업자와 바람이 났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보물도 도난당하고 말았다.  


수호신처럼 연로하신 어머니의 마음 한 편을 지켜주던 보물을 잃어버린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며칠을 밥을 못 드시다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고 한다. 집수리 비용이 예상했던 금액보다 더 들다 보니 준비된 돈이 빠듯했다. 그렇다고 바람피울 돈에 눈이 멀어 시어머니의 참깨통까지 서 훔쳐간 것을 생각하면  분함을 어찌할 수가 없다.




예쁜 막내며느리가 시골로 시집와줘서 고맙다고 통 크게 자동차도 사주고, 공부하고 싶다 해서 대학도 보내줬더니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다. 훗날, 혼자된 아들도 있는데 그거 없었다고 치자며 달래주시는 아버지 말씀에, 눈물지으며 밥 한술 제대로 뜨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미어졌다. 막내아들 하루라도  끼니 챙겨주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시던 어머니모습이 참깨의 타닥! 이는 소리와 함께 오버랩된다. 


어머니!

막내아들 잘 살고 있어요.

요즘 모내기 하느라 정신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전에 올케언니가 참깨도 볶아다 주었다네요.

다음에는 제가 볶아다 줄게요.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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