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가 터지고, 맹장이 터져도

by 희야 ㅡ 박상희

길었던 겨울방학이 지났다. 이제 숨을 돌리려나 했더니 딸 허리디스크가 터졌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허리가 불편하다며 MRI나 한 번 찍어볼까 하던 딸이었다. 디스크가 터졌을 줄은 눈곱만큼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통원 치료 몇 번 받으면 나아지겠거니 했다.


MRI를 찍어본 결과 허리디스크 5·6번이 터져 수핵이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딸은 곧바로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그 정도면 참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건만 걱정보다 말문이 막혔다. 참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딸의 수술로 우리 집은 다시 비상상황에 돌입했다. 병원에 필요한 물건을 챙겨다 주고, 학교에서 돌아온 손자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이 들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딸의 어린 시절 별명은 곰지였다. 'ㅇ지'라는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 없고 순한 편이라 나를 크게 힘들게 한 적 없는 아이였다. 어쩌다 밥상 앞에서 졸다 엎어져 잠이 들기도 하고, 소리소문 없이 먹던 밥그릇을 식탁 아래로 엎어버려도 내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다만 너무 말을 안 해 답답할 때도 있었다. 아무리 타고난 기질이라 해도 입을 꾹 다물고 변명도 하지 않을 때면 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굴 속에서 마늘을 먹으며 사람이 되려는 곰처럼 딸은 평안했다.


가끔은 그랬던 아이가 내 딸이 맞나 싶을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결혼식에서 돌아오던 대절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동요도 아닌 가요를 당차게 불러 젖혔을 때가 그랬다. 도무지 그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아이였다. 대학도 수시로 한 번에 들어가고, 과외해서 모은 돈으로 친구와 유럽을 3주 동안 자유여행으로 다녀왔다.


더 놀라운 일은 돈이 아까워 그 머나먼 타국에서 거의 매일 말라비틀어진 바게트를 입에 물고 걷고 또 걷다가 버스를 탔다고 했다. 망가진 트렁크 바퀴를 질질 끌고 귀국한 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 딸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럼 우리 아들은 어땠을까. 코로나19가 시작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벌써 몇 년 전 일이니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병원 가는 일이 힘들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상하게 소화제를 먹어도 자꾸 배가 아프다고 했다. 하필 나를 닮아 속이 안 좋은가 싶었다. 동네 병원을 다니다 조금 더 큰 병원으로 갔더니 맹장이 터졌다는 것이 아닌가. 왜 그 지경이 되도록 참았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찾아보니 맹장이 터진다는 것은 충수염이 진행되어 충수 돌기가 파열되는 상태를 말한다고 했다. 복막염이나 복강 내 농양 같은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응급 상황이라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수술할 의사가 없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수소문하던 끝에 중급병원에서 수술 경험이 많은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라 지체할 겨를도 없이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예상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수술실 밖에서 떨고 있던 내 입이 떨어진 마른 잎처럼 바싹바싹 말랐다. 코로나19 시기라 1인실에서 일주일 동안 쪽잠을 자며 간병을 했다. 대수술이었지만 아들은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복중에 쓸데없는 일복은 왜 그리도 많은지 나는 또다시 겨울방학만큼이나 바쁜 처지가 되었다. 연차를 쓰고 병가까지 내며 재활하는 딸의 식사까지 챙겨야 한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그동안 서로 바쁘고 엇갈리는 시간 탓에 딸과 길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이참에 마흔을 넘어 중년이 되어 가는 딸과 마주 앉아 미주알고주알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늘어진 능수버들에 물이 오르듯 봄날을 즐기고 있다.


디스크가 터지고, 맹장이 터져도 내 딸이고 내 아들이다. 어떤 일을 겪어도 나는 끌어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건강만은 잘 챙겨 더 이상 엄마를 놀라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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