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순수하다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어린 아이를 떠올려보면 아름다운 것에 망설임없이 팔을 뻗거나 원치않는 음식 앞에서 질색하며 고개를 내젓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순수란 숨김없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들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런 순수라는 단어를 붙인 이 소설 순수의 시대는 앞서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뉴욕을 그려낸다.
치밀함이 느껴질 정도로 순수를 가장하며 속마음을 은폐하고 살아가는 뉴욕 사람들 사이에 있는 아처는 이 거짓된 순수의 관습들이 어느정도 잘못됐다고 느끼는 한 젊은이다. 스스로 이런 모순된 모습들이 잘못됐음을 알고있다 생각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아처 본인도 그 순수를 깨고 나오지는 않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관습들이 아주 크게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뉴욕의 순수에 때묻지 않은 엘렌을 만나며 이런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자유를 얽매어오는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눈뜨게 된다. 이때부터 아처의 삶은 평화로운 무지에서 탈출한 고독한 반항아로 남은 여생을 살아가게 된다. 계속해서 잡지 못한 엘렌을 떠올리지만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떠날 결정을 할 용기는 없다.
그저 사회의 관념에 맞춰 살아가는 자에게는, 그것을 깨고 나와 불편한 삶을 감내할 용기가 없는 자에게는 여태껏 사회가 베풀어왔던 한정적인 안락만 누릴 수 있다. 아처 또한 익숙한 안락을 택했기에 엘렌과의 사랑을 이룰 수는 없었다. 사랑이나 자기가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를 얻고자하는 자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 불편을 감내한 어떤 선구자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순수한 뉴욕 사회에서 누군가는 이런 불편을 겪었을 것이고 그것의 결과로 아처가 평생 기대조차 하지 못한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된 아처의 아들 댈러스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순수의 시대는 정말 순수한가?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순수하다고 믿으며 안주하는 것은 아닐까? 용기낼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지 않기에 우리는 불편할 수 있을 때 그 불편함에 뛰어들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어떤 소중한 무언가를 모른채하며 평생을 회한으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