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챈슬러의 금융투기의 역사를 읽고
1.
나의 또래들이 대부분 그렇듯 암호화폐는 난생 처음으로 겪고 있는 투기의 장이다. 이 투기의 장에 뛰어든 친구들 중 일부는 일생에 다시 없을 기회라며 사뭇 진지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되물림되는 부의 질서는 웬만한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법칙쯤으로 생각했던 우리 세대에게 150만원으로 10억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목을 사로잡을만 했다. 오랜 기간 힘겹게 모은 돈과 무리해서 대출을 받은 돈까지 몽땅 각종 화폐들을 사들이는데 쓰며 내가 산 이 화폐가 인생을 바꿔줄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
나는 그 친구들처럼 위험을 부담하며 암호화폐에 인생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 친구들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또한 이런 기회가 다시 없을 엄청난 기회라고 느껴졌지만 나의 기회가 아니라 생각하며 보냈을 뿐이었다. 혹여 운이 좋아 다음에 또 이런 투기의 기회가 오면 좋겠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투기는 꽤나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에 출발하여 1630년대 튤립투기부터 갖가지 종류의 투기를 거치며 현재의 비트코인 투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투기들이 있었다. 세상에 새로운 기술이 빠르게 등장할수록 투기의 간격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그렇다면 다음 투기의 시장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역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가 그러했고 암호화폐가 그러했듯 다음 투기의 기회를 잡으려면 남들보다 먼저 뛰어들어가 있어야 했다. 부풀어오를 시장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중요했다. 이 능력은 개발될 수 있는 것인가? 각종 투기의 시장에서 낌새를 먼저 눈치챘던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2.
우리 부모님만 해도 암호화폐에 뛰어드는 젊은 친구들을 투기나 하는 한심만 놈들로 취급했다. 보편적인 노동 외의 행위로 큰 돈을 벌려는 욕심은 이 세상에서 양심없는 악행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노동만으로 큰 돈을 버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 쉽게 큰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일로 취급된다.
지분을 받고 일했던 회사가 상장을 하여 큰 돈을 벌게 된 청년은 선견지명이 있는 건실한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전재산을 쏟아부어 가상화폐 투기에 매진해 큰 돈을 번 청년은 위험천만한 모험에서 아주 운좋게 살아남은 투기꾼의 취급을 면할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믿는 가치에 인생을 베팅한다. 그것이 노동의 형태든 돈의 형태든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사회는 돈의 형태로 베팅을 하는 것을 투기 혹은 도박이라 칭하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걸까? 세상의 부는 제로섬 게임이란 믿음이 팽배해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