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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Nov 21. 2019

뒤늦은 스킨십

 주저하면 늦어요.

 일곱 살 즈음이다.    


 꼭대기 집에서 시장을 가려면 무질서하게 놓인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야 한다. 그날 엄마와 나는 시장을 가고 있었다. 엄마의 큰 손이 다 잡히지 않아 엄마 손가락 세 개만 쥐고 돌계단으로 한 발씩 옮기고 있었다. 나는 입으로는 재잘되며 팔을 흔들며 가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가 화를 내며 손 좀 놓으라고 뿌리치셨다. 놀랐고 무서웠고 거절당한 것 같아 무안했다. 나는 입을 닫았고, 눈물이 자꾸 나는데 엄마가 알면 혼날까 봐 뒤돌아서 눈이 간지러운 듯 비볐다. 꼭대기 집에서의 일들이 자세히 기억할 수 없는 때였지만 그 감정은 잊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 달에 엿새만 집에 오셨다. 엄마 혼자 딸 셋을 키우셨다. 어려운 살림에도 남의 손 한 번 빌려본 적 없는 꽂꽂한 성품이신 엄마, 체력이 약한 엄마에게는 하루하루가 버거운 일이었다. 결혼은 했지만 남편은 멀리 있고, 아이만 셋, 쓸쓸함과 고단함을 나눌 상대가 없는 외로운 엄마. 채찍으로만 아이를 가르치던 엄마.     


 나는 결혼 후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엄마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내 아이가  예쁠때, 아플때, 잘했을때, 잘못했을때, 다수의 상황에 언제나 엄마와 지냈던 과거의 시간들이 나를 붙잡고 놓치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가 예쁘면 예쁠수록 더욱더 이해가 힘들었다. 때때로  불안이 많았던 어린 내가 생각날때는 처량함을 느끼며 울기도 했다.

      

 어느 날 엄마집에 갔는데 엄마가 말씀하신다. "윗집에서 하는 소리가 들려. 우리집을 고소한다고 하는거야." 매일 새벽 6시 넘어 청소기를 돌리는 윗 집때문에 엄마는 잠을 잘 못 이루셨다. 윗집에 가서 부탁도 해봤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에게만 독하게 말씀하시지 밖에서는 얌전하게 말씀하시는 성품이시라 참고 사셨다. 윗 집 대화를 옆에서 들은 것처럼 옮기는 걸 보며 엄마가 걱정이 되었다. 아빠는 일하러 여전히 한번 나가시면 두 달 동안 집에 오시질 못한다. 혼자 계시는 엄마가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도 성격이 불같고 강했던 모습이 생각나 다정하고 자상한 딸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병원을 어렵게 모시고 갔고 진단명은 우울증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를 여자로 보기 시작했던 것은.     

     

 그전까지 엄마에게 느꼈던 원망, 나에게 했던 과하다고 느낀 꾸지람과 체벌, 엄마가 어려워 피하고 싶었던 자식의 비겁함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엄마이기도 했지만 여자였던것. 엄마로서 자식에게 했던 일들로 엄마를 판단하고 그 기억들을 꽁꽁 싸매고 내 가슴 속 아픈 것만 들여다 보았던 것이다. 엄마이기 전에 여자로서의 삶은 생각지 못했다.      

     

 

여자는 결혼하고 남편을 한 달에 볼 수 있는 날은 고작 엿새였다. 그것도 밤에 잠깐이다. 혼자 작은 셋 방에 살면서 굶는 날도 여러 번. 돈이 없어도 쌀이 없어도 남에게 손 빌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여자는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무섭기도 한 긴긴밤을 홀로 지낸다. 6.25 전쟁 중에 여자의 친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여자는 외동딸로 친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며 그리워하듯 이야기를 자주했다. 친어머니는 재혼을 하였고 새아버지와 이부형제 사이에서 여자는 적잖이 차별받고 집안일은 여자의 몫이었다. 혹시나 시댁에서 말이 나올까 어머니는 딸인 여자를 더욱 하게 대했고 더욱 외롭게 했다. 벗어나고 싶던 여자는 결혼을 하고 친정을 멀리했다. 여자는 친정어머니가 새아버지에게 어떤일이든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여자가 결혼 후 남편의 행동이 의심스러워도 겉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는 날은 무수히 많았다. 오랜 시간 참고 참음이 병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말하지 못한 것,참았던 감정 들을 여자가 낳은 어린 자식들에게 과하게 쏟은 것이다. 기대어 본 적 없고 도움 받으려 손 내민 적 없는 여자는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가시옷을 입었고 주변사람들은 아파서 여자 곁에 가기를 꺼려했다.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조심스레 스킨십을 시도한다.           


  오랜만에 엄마 집을 찾았다. 하얗게 센 머리에 구부정한 어깨, 놀란 눈으로 어쩐 일이냐며 맞이하신다. 분명히 ‘엄마, 잠깐 얼굴 보러 갈게요.’라고 한 시간 전에 전화를 했는데도 말이다. 엄마 옆에 앉아 엄마를 살핀다. 지난번과 달라진 모습은 없는지, 눈의 이물감은 없어진 것 같은지, 환절기인데 감기 기운은 없는지, 어디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시는지, 궁금한 건 없는지, 팔의 떨림은 덜한지, 아빠 때문에 속상한 점은 없는지 나는 촉을 세운다. 말씀하시면서도 계속 떨리는 엄마 팔이 힘들어 보여 나는 내 손을 엄마 팔 위에 얹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야 스킨십을 하려는 나의 게으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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