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에서 질문하는 관계로!

몸을 맡겨도 무너지지 않는 이

by Tess


어젯 밤 섹스를 하고 누워있는데 남자친구가 막 다리를 마사지 해줬다. 예전의 나라면 허벅지와 엉덩이에 덕지덕지 붙은 셀룰라이트가 신경쓰여서 맨다리를 보여주기도, 또 그렇게 몸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편하게 받았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전남편은 내 다리에 셀룰라이트가 많다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셀룰이"라고 부르곤 했다. 지금의 남자친구는 내 몸을 찬양한다. 허리부터 엉덩이 다리의 모든 라인이 다 섹시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내 몸이 비율이 안맞는다며 콤플렉스였는데, 이 아저씨는 전혀 다르게 본다. 좋아서 정말 어쩔 줄을 모른다;;;


처음엔 이게 너무 낯설었다. '내가 이렇게 섹시하다고?'하면서 전남편과 정반대로 반응하는 남자를 보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서럽기도 했다.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대해주지 못했나...'하면서 말이다.



물론 내가 12살이 어리니까, 오빠에게 신체적으로 저렇게 어필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것말고도 이 남자는 전반적으로 서포티브하다. '나는 너 편이야, 희연아'라는 메세지를 확실히 준달까?


내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그 후에 자발적인 방황을 시간을 가지려는 것도 모두 다 지지한다. 그것이 '희연이 너가 원하니까..'의 층위가 아니다.


자기가 살아보니까, 마흔이 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시간. 무엇이든 경험해보는 시간'이 너무 중요하단걸 알겠단다. 그래서 나의 무직상황에서 어떤 불안을 견디는 것을 해보란다. 아니 꼭 해봐야한단다. 그 후의 희연은 달라질 것이라면서 ^ ^


나의 이런 의도와 결을 알아주어 얼마나 고맙던지!



이 지점이 내가 전남편과 있을 때와는 다른 지점이다. 나는 그에게 이런 진하게 '나는 너 편이야. 너가 무엇을 하든지 응원해! 나는 너가 하려는 바를 알겠어'라는 신뢰를 못느꼈다. 오히려 박해받았다고 묘사 할정도다. 이혼 사유 중의 하나가 '은유의 글쓰기교실이나 감이당으로 공부하러 다니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서로 이해를 못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오빠는 다른 시선으로 나를 봐주고 좋아해준다. 내가 15년간 한 남자를 만나다 헤어졌다는 것도 로열하게 본다;;(나는 그 사실이 그렇게 병신같더만) 나의 이 하이톤의 목소리도, 나의 이 푸짐한 엉덩이도(요즘 살도 엄청쪘다) 다 예쁘고 좋게만 봐준다. 자기가 나에게 빠진 이유란다?! 어머>< 그래서 요즘엔 오빠를 만나면, 참 따뜻하고 감동을 받는 순간이 많다. 실제로 오빠에게 자주 하는 말도 '고마워~'이다.





그런데 전남편은 정말 악역이었을까?



그도 사실은 나를 서포트하는 말을 하긴 했었다. '희연아, 잘하고 있어. 희연아 말만 해. 내가 해줄게!'라면서 내 편을 진하게 들어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왜 그땐 그 말들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을까?



그 시기의 나는 외부에서 지지를 받아야 했고, 허락을 얻어야 했으며, 타인을 통해 안전을 확보해야만 했다. 내 안에 중심이 없었기에, 내가 생각한 권력이 있는 사람-부모, 남편-으로부터 '내가 잘하고 있음'을 확인받아야만 안심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의 나는 남편과 경쟁할 수 밖에 없는 관계를 맺었다. 왜냐하면, 내가 옳은지, 잘 살고있는지를 계속 외부에서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니, 타인이 나를 지지하고 조언을 해줘도 이것이 100% 있는 그대로 와닿지 않았다. 어떤 평가와 판정으로만 들리는 것이다. 나를 위한 말을 해줘도... '나를 이기려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를 고치려고 하는 것같아 기분이 나쁜데?'라며 찝찝해했다.


이것이 자기신뢰 혹은 확신이 없이 불안에 잠식된 사람의 사고패턴이다. '나는 이게 맞다고 생각해. 내가 옳아. 그 선택도 결과도 내가 책임지겠어'라는 확신이 없기에... 가까운 사람에게 묻고 확인을 받으려 한다. 그런데 외부의 그 말조차도 신뢰할 수 없어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기반으로 결혼을 했어도 '누가 더 옳은가? 누가 더 자격이 있는가?'의 승기를 잡으려 무의식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건 누가 잘못했다기보다, 중심없는 주체가 타자와 관계맺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래서 그땐 내가 늘 아래에 있다고 느꼈다. '이렇게 할까? 여기 가보려고 하는데...'하면서 중심없이 선택 하나하나에도 허락을 구했다. 남편에게도 삶에게도 말이다. 그렇게 그 당시의 나는 사랑이란 명목 하에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다: "찬양 대신 질문이 먼저 나온다"



'오빠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줘, 따뜻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내 남친이 이렇게 멋있다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보다 질문이 먼저 나온다.



"어?! 내가 왜 다르지? 내가 다르게 반응하지?" 라는 질문이 올라오고, 이런 나를 관찰한다.


전남편도 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인데, "왜 그때의 나는 그를 박해하는 사람으로 봤고, 지금의 남친의 말은 하나 하나가 다 와닿는 것일까?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하면서 멈추고 질문하고, 바라보게 된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를 보면서 '변한 주체는 나'라는게 명확해졌다. 더 이상 외부의 타인에게 '이래도 되요? 저 괜찮아요?'라면서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불안을 잘 대할 수 있게 되었달까?



예전의 나라면 '나를 이렇게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니!!!'라며 과잉 의미부여를 하고, 상대를 위로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우열관계 만들고 비대칭적 구조에 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전남편을 구원자로 만들고 의지한 것처럼...


이건 사랑이고 진심이기도 하지만, 의존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감동도 받고, 따뜻함도 느끼지만 바로 점검한다.


'이것이 그가 대단해서인가? 내가 그런 남자를 운좋게 만나서인가? 아니면 이제 내가 받을 수 있는.. 수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인가?'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관계의 중심이 나로 옮겨졌다는 증거다. 찬양은 중심이 외부에 있을 때 나오고, 질문은 이 중심이 내 안에 있을 때 나온다.



지금의 나는 이 정서적 서포트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동은 받되, 이것에 붙잡히거나 매달리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사이에 위계질서를 만들지 않기에 과거의 관계와 다른 큰 차이를 발생시킨다.


이런 구조를 보는 나는 감동할 수 있고, 진심으로 고마워도 하지만 동시에 거리도 유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파트너를 "구원자"로 만들지 않는다.


아... 이런 내가 되기를 얼마나 소망해왔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질문하고, 나를 점검하고, 되돌아가지 않으려 피를 흘렸는지!!! 그 결과물이 이것이다.


수 많은 눈물의 밤, 가슴을 쥐어뜯으면서도 예전의 것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그 패턴으로 가지 않으려 의지를 발휘한 것이 이렇게 나를 성장시킨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예전의 나는 사랑을 받으면 나를 내줬지만, 지금의 나는 사랑을 받아도 나를 지킨다.



여기까지 오자, 정말로 과거로 혹은 전남편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긴다. 물론 흔들리고 과거를 생각하며 아파하는 순간은 오겠지만... 중심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 세계를 떠났으며, 소중한 나의 중심을 만들어 냈으므로 ^ ^






좋은 사람을 만나, 내가 변했나?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게 아니다. 내가 오빠를 만나서 전남편이란 세계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 채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풍성하고도 성숙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어른의 연애를 한달까? ㅎㅎㅎ



결국 내 것, 나의 세계, 내 중심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이럴 때 타인은 더 이상 검열자도, 구원자도 아니게 된다. 나는 내 인생이지만 외부에 의존하던 객체에서 내 삶의 깃발을 잡은 주체가 되었다. 땅에 발 붙이고 서있는 느낌_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안정감이 참 좋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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