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로부터의 독립] 상처받은 내아이에게 건네는 첫 손

by Tess

요즘 따라 자꾸만 10살, 11살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신림동에서 살다가 분당으로 새 아파트에 이사했던 그 무렵. 엄마와 외출하고 돌아온 어느 날, 집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열쇠를 돌려도, 벨을 눌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열쇠 아저씨를 부르기로 했고, 나와 엄마는 아파트 계단에 쪼그려 앉아 열쇠 아저씨를 기다렸다.

10분쯤 지나, 아저씨가 드릴을 꺼내 집 문을 따려던 그 순간. 아빠가 안에서 벌컥 문을 열었다. 모두가 당황했다. 아빠는 갑자기 열쇠 아저씨의 공구함을 발로 차며, 왜 남의 집 문을 따려 하냐고 고함을 질렀다. 싸움이 날 뻔했지만, 엄마가 중간에서 겨우 막아냈다.

알고 보니, 아빠는 엄마와 나를 집 밖에 세워두려 했던 거였다. 자기 기분이 풀릴 때까지, 벌을 주듯이. 그걸 알았을 때, 어린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결국 싸움이 터졌다. 집 안은 소주병이 깨지고 반찬이 엎어져 엉망진창이 됐다. 아빠는 물건을 집어던지며 난폭해졌고, 엄마는 쌍욕을 퍼부었다. 그 광경 속에서 나는 그저 얼어붙어 있었다. 도망칠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결국 아랫집 아저씨가 올라와 중재해주었고, 싸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긴장은 여전히 집 안에 가득했다. 깨진 유리조각을 치우다 발바닥을 베이고 피가 났을 때, 아빠는 술냄새 나는 입으로 내 발가락을 빨았다. 미안함인지, 술김인지 알 수 없는 행동. 나는 그 순간, 역겨움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그 후로 나는 엄마와 똘똘 뭉쳤다. 엄마는 약자였고, 나는 엄마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가혹하지 않았지만, 언제든 화를 내며 나를 쫓아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긴장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 어린 시절의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이혼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이유 모를 불안에 휩싸였다. 그 실체를 이제야 똑바로 본다. 10살의 나는 집 밖에 세워진 채 무기력했다. 두 미성숙한 어른의 증오를 온몸으로 견디던 어린아이였다. 그때 나는 버림받을까 두려워했고, 사랑받지 못할까 봐 숨죽였다.


이제는 안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무서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걸.

이제야 비로소, 그 어린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

"아이야, 이제 언니가 있단다. 우리 손을 잡아볼까?"

오늘, 나는 내 안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걸로 충분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2023년 5월 3일에 썼던 일기.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첫 발견이라 의미가 깊은 글이다. 브런치에 정리해서 기록 겸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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