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립일기

[몸의 독립] 임신에 붙은 내 자아

by Tess

지난 화요일, 감이당 ‘화요대중지성’에서 곰샘이 책 '청년붓다' 강의를 하셨다.

본생담 이야기를 하시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 진리에 대한 서원을 세우는 것 (여기서 지혜가 나온다)

2. 공덕을 쌓는 것 (그래야 자비심이 나온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려면 자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셨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나는 질문을 했다.

“일상에서 어떻게 자아를 비워낼 수 있을까요?”


곰샘은 내가 자의식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점을 발견하고, 자기 객관화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럴 때 역지사지가 가능해지고,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오호—


며칠째 계속 생각했다.

‘자아를 비운다’는 게 도대체 뭘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딱 하나 발견한 것.

내 자아는 ‘임신’이었다.

삶 전체가 ‘임신을 위해서’, 혹은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서’로 세팅되어 있었다.


1. 어디 소속되어 일하는 걸 꺼리는 이유


나는 영어교육 쪽에서 다양한 일을 해왔다.

영어유치원, 정상어학원 초·중등부, 방과후학교, 사립초등학교, 공립중학교, 입시 과외, 유학생 과외 등등…


이렇게 여러 필드에서 일하면서도 자주 그만뒀다.

그 이유는?

1. 자궁내막증 수술 때문에 → 정상어학원 그만둠

2. 임신 준비 때문에 → 사립초 그만둠

3. 임신해서 → 공립중학교 그만둠

4. 유산해서 → 과외 다 끊음


진짜… 자궁 상태, 임신, 유산에 따라 결정된 커리어였다.

심지어 영어교사란 직업을 선택한 것도 “아이 낳고도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고.


그렇게 피치 못한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둘 때마다,

회사, 고용주, 그리고 나 자신 모두에게 상처가 남았다.

“더 이상 못 나옵니다”라고 말할 때,

얼마나 많은 핀잔과 비난을 들어야 했는지 모른다.


이런 경험들이 결국

지금 고용되는 것에 소극적인 나를 만들었다.


2. 상황에 따라 아이를 원했다, 싫어했다


얼마 전 서초동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내 뒤에 프랑스 남자 + 한국 여자 + 아이 둘로 구성된 가족이 앉았다.

공연 내내 아이들이 큰 소리로 떠들고, 내 의자를 발로 툭툭 찼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왜 저런 애들을 데려와서 공연을 방해해?’

‘매너도 없는 것들이 왜 애를 낳고, 공연을 보러 오냐고!’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저런 아이가 없으니까.

나는 못 낳았으니까.

부부+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이 꼴 보기 싫었던 거다.


같은 주 일요일,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데

한 엄마가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와서 내 옆에 앉았다.

애들은 덥다고 징징대고, 싸우고, 엄마는 지쳐 보이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애 없어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했다.


상황 따라 바뀌는 감정.

내 자아가 얼마나 강력한지 느껴졌다.


3. 운동도 임신 때문이었다


운동도 마찬가지.

약 3년간 짓댄스에서 골반 세우는 운동 죽자사자 했던 것도,

유산 후 다시 임신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운동을 쉬고 있는 이유도 ‘혹시 쉬면 임신되려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ㅋㅋㅋ


(현대무용반은 운동 강도가 너무 세서, 쉬면 오히려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필라테스 강사가 된 것도 유산 이후였고,

‘3보 이상 택시’가 좌우명이었던 내가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도

몸을 회복해서 임신하려고였고.


하루라도 운동 안 하면

“이것 때문인가…?”라는 불안이 몰려왔다.

임신만을 목적에 두고 사는 삶, 무섭고 지쳤다.


4. 사람을 만날 때도


임신, 아이, 육아, 출산에 붙은 자아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작동한다.


이 주제를 안 건드리는 사람들과는 관계가 편하다.

그럼 막 퍼준다.

이것도 가져가라, 저것도 가져가라.

내 욕망을 투사하는 거다.


반면, 누가 건드리면 못 버틴다.

카톡 프로필에 만삭 사진이나 출산 사진 올라오면 ‘숨김’ 눌러버릴 정도다.

그렇게 내가 차단한 인연이 꽤 된다.

요즘 정말 많이 와닿는 말이 있다.

“목적이 있으면 망한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망했다가 살아났다.

임신에 붙은 자아 때문이다.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아이를 원했던 건,

엄마의 말, 사회가 주입한 여성상, 종교적 기준의 영향이 컸다는 걸.

정상가족이라는 틀 안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

가임기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게 온전히 내 욕망은 아니었다.

판이 주어진다.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거리를 둘 수 있게 됐다.


니체는 이걸 pathos of distance라 했다.

강한 사회적 예속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힘.


나는 이제,

이 예속화된 상태로부터 힘을 내어 거리를 두고,

임신에 붙은 자아를 조금씩 비워보고 싶다.


니체는 철학자를 ‘잉태하는 존재’로 봤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그토록 임신에 목매달고

아이를 갖기 위해 애썼던 모든 노력들—

이제는 좀 다르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무엇을 잉태하고 싶은가?


(참고로 이 글은 2023년 7월에 쓴 글로, 여전히 임신에 매달릴 때... 혼인유지상태일 때 블로그에 기록해놨던 것이다. 현재 나는 임신에 대한 어떠한 기대와 생각도 없으며 이혼 후 싱글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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