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인 관계의 기록
지난 수요일부터 열이 펄펄 끓었다. 응급실까지 다녀왔고, 약을 바꿔가며 이틀째 누워 지내고 있다. 그 와중에, 나를 걱정하며 병원까지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내 섹파(?) J군이다.
“왜 너는 나랑 섹스하고 나면 아프지?”라며 걱정하더니, 자기 멋대로 나의 편도염이 자기와의 섹스 때문이라 생각하고는 비뇨기과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결과는 ‘정상’. 그 얘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귀여운 녀석.
나는 J에게 솔직히 말했다. 교사라는 직업 특성상 목에 무리가 많고, 무엇보다 이혼 1주년을 맞아 심리적으로 과부하가 왔던 거라고. 그래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그러면서도 덧붙였다.
“나는 너랑 섹스하는 거 엄청 좋아. 그래서 주말 비우려고 노력해.”
그의 답장은 간단했다. “토닥토닥.”
이게 무슨 관계냐고? 썸도 아니고, 연애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건 또 아니다. 그냥… 실험 중이다.
누군가와 감정을 주고받고, 웃고 울고, 이야기를 나누고, 섹스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정의하지 않고, 이름 붙이지 않고 살아보는 중이다. 실험적으로.
J군은 여러모로 전남편을 떠올리게 하지만 또 다르기도 하다. 회사의 타이틀, 사는 지역,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 명예나 지위에 대한 집착, ‘도태될까 봐’ 하는 불안감. 이것이 80년대 후반생 한국 남자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특성인가 싶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 앞에서 내가 굳이 페르소나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남편 이야기, 내가 관심 있는 철학 이야기—라캉이든 들뢰즈든—그가 알아듣든 말든 상관없이 나눈다. 그 역시 꾸미지 않고 솔직한 모습으로 응답한다.
무엇보다, 나는 내 중심을 확실히 잡고 있다.
내 삶, 내 윤리, 내 쾌락을 최우선에 두며 경계를 분명히 지킨다.
그가 조금이라도 나를 소유하려는 기색만 보여도, 나는 선을 긋는다.
‘사귀자’고 말하는 J군에게도,
“섹스만 하자. 우리 섹스하는 사이야.”라고 정확히 말하며 선을 긋는다.
이래도 된다.
내가 나로 살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누구와도 새로운 관계를 시도할 권리를 얻었다.
이름은 없지만 따뜻한, 정의할 수 없지만 나를 확장시키는 관계들.
나는 그런 관계 속에서 더 살아있다고 느낀다.
실은 나, 이런 관계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더라.
내 욕망에 솔직하고, 내 몸이 원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더라.
그리고 여기에 단 한 치의 수치심도 없다.
이 모든 건 두 번의 유산과, 15년간 만난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댓가 끝에 얻어낸 세계다.
이제 나는 여성의 욕망을 억압하던 목소리들에서 자유롭다.
이제는 ‘어떻게 보일까’보다는 ‘무엇을 원하는가’에 귀 기울인다.
38살의 싱글 여성이 섹스를 하지 못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없다. 전혀 없다.
물론, 나도 이렇게 섹스 파트너를 두고 서로의 욕망을 채우는 관계를 맺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지점에서, 나도 나에게 놀란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 말고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면 안 된다’고 믿었었는데—
지금은 마음에 들면 먼저 다가가고, 먼저 몸의 언어를 나눈다.
이혼한 지 딱 1년.
전남편은 전남편대로 흘려보내고, 새로운 남자와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중이다.
이게 바로 라캉이 말한 쥬이상스(jouissance) 아닐까.
쾌락과 고통의 경계를 넘나들며, 더 깊은 생을 감각하는 것.
나는 지금,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를 실험 중이다.
이것은, 그 실험적인 관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