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 믿었던 권력욕의 이면의 여정
최근 나에게 ‘안전’이란 이슈가 크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불안한 이유는 언제 어디서 부모님이 침범해 올 지 모른다는 것에서 온다. 나의 부모는 그들의 소유로 나를 여기기 때문에,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다.
‘내가 원하면 너는 언제든 볼 수 있는 존재야’라고 보고, 나는 거의 평생을 이에 좌지우지 되었다.
고등학교 땐 엄마가 함부로 내 일기장을 보고, 즉각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다. 내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깊은 절망과 실망 속에서 집 안에서 일기장을 태웠다. 그러면서 나의 한 부분을 함께 죽였던 것 같다. 이런 부모 밑에서는 나의 조각들을 없애갈 수 밖에 없구나… 하고 느꼈다.
이렇게 내가 얼마나 깊이 그리고 오랫동안 ‘안전하지 않아서’ 불안해했다는 것을 보자, 연쇄적으로 나의 결혼생활이 떠올랐다.
“아! 나는 너무도 이 집을 떠나 어떤 안전한 기지에 들어가고 싶어서 결혼을 했던 것이구나. 그래서 전남편에게 그토록 매달렸던 것이구나!”
그리고 이런 통찰 뒤에 하나가 더 왔다.
‘아 나는 부모를 떠나 너무도 나로 살고 싶었구나!’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자기권력감이라고 한다. 내가 사는 환경과 관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감각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며 행동하며 내 삶과 감정을 주도할 수 있다는 능력감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런 자기권력감을 너무도 갖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사는 구도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나를 ATM기 취급하며, 아버지에게서 돈을 빼내는 도구로 쓰는 엄마, 할머니에게서 독립하지 못해 나를 효도의 도구로 쓰는 아버지_ 이 안에서 나는 억지 복종과 거짓 순종을 하며 나 자신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며 답답해하기만 하면서…
그래서 나의 결혼은 이런 구도 안에서의 탈출이자, 새출발, 나로 살 수 있는 기회, 사랑을 이루는 동앗줄이었다. 하지만 자기권력감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는 불안과 두려움을 다룰 줄을 몰랐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융이 말하는 그림자가 되어버린다.
나는 전남편을 ‘편해서, 그와 있으면 나로 존재할 수 있어서’ 선택했다. 당신이 돈을 못 벌어도, 흔히 말하는 전문직이 아니어도, 집안이 못살아도, 나보다 학벌이 낮아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냥 그이면 됐다.
오래도록 나는 이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내가 너무도 사랑해서, 이 모든 것을 희생한 채 결혼을 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권력감과 그림자를 대입해서 보니, 나는 부모에게서 눌려오느라 발휘하지 못한 권력감을 전남편을 상대로 쓰고 싶어했다. **‘당신이 나보다 학벌도 안 좋고, 집안도 못사니까…’**라며 편하게 생각했고, 저 정도 조건이면 내가 그이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으니까라며 권력상으로 위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그토록 전문직과 선을 봐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우위에 서서 좌지우지하고 싶어하는 권력욕’**이지,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와… 나는 정말 내가 전남편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사랑만 보고 그를 고르고 같이 산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이 점이 보이자, 눈물이 쏙 들어간다. 그를 놔줄 때가 온 것 같다. 아니 자연스럽게 놓아져진다.
자기권력감의 그림자는 저렇게 내가 상대방을 찍어누르는 권력을 실질적으로 갖고 싶다도 있지만 과한 의존과 통제도 있다. 나는 전남편에게 무지하게 의존하면서도 그를 통제하려고 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하고 사는데… 나한테 왜 이것밖에 못하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라면서 나를 볼모삼아, 물고 늘어지면서 동시에 내 뜻에 따르도록 통제하려 했다.
이는 중심 같은 것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외부 권력에만 의지하던(의지해야만 했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외부의 것을 내 안전망으로 삼아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도 진정한 의미의 안전감은 아니지만… 나는 이렇게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전남편에게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통제함으로써, 내 사람이라며 안심하고 부리면서, 억압의 그림자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이는 정확히 라캉이나 융이 이야기한 것과도 일치한다. 어린시절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느낀 나는, 안전을 향한 욕구만큼 상대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키워왔다. 그리고 그것을 결혼생활에서 내내 상대방에게 풀었다. 버려지지 않으려면, 타자의 욕망에 나를 집어넣어야만 존재가 보장되는 구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억압된 두려움은 외부를 통제함으로써 자기 취약성을 숨기려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한편 억압된 만큼 나는 독립의 욕구가 있는데, 이것이 부모와 있을 때는 충족되지 않아, 자기권력감을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자기(Self)가 없으니, 페르소나(Persona): 남에게 보여지는 역할로 보호막을 삼고 산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나에게 선생이란 직업, 와이프라는 역할, 부잣집 외동딸이란 타이틀은 굉장히 중요했다.
남편이 떠나고 난 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던 **‘머슴 같은 사람’**을 잃었다며 울고 다녔다. 안전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와장창 깨졌으니, 그 배신감과 분노가 취약성으로 드러났다. ’당신 없는 나는 어떻게 하라고?’라면서 말이다. 동시에 나는 그런 요망한 꼬맹이인 나를 미워하고 또 반성했다. 그런데 이렇게 남편을 **‘머슴’**이라고까지 표현한 것 밑에는 나와 내 원가족에서부터 온 뿌리 깊은 안전욕망과 불안이라는 이슈가 있었다.
이젠 이 그림자가 인지된다. 내가 오래도록 그를 붙잡고 헤어져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결핍감의 근원, 권력욕의 이면이 보인다. ’편안함’과 ’사랑’이라 불렀던 것의 이면에는 너무도 불안해 공포에 떨던 어린 희연이, 사랑받고 싶어하는 희연이, 한 번도 충족된 적이 없는 희연이, 그래서 외부에만 의존하고 그걸 조금이라도 통제해야 안심하는 희연이, 눌려온만큼 나도 누군가에겐 힘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희연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에게 이혼과 독립은 100%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어쩌다 어쩌다보니, 떠밀려서 여기까지 온 느낌이 크다. 이혼이란 말도 전남편의 입에서 먼저 나왔고, 부모랑도 이렇게까지 단절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나는 타의로 내 권력을 모두 다 잃었다.
처음엔 ’세상 어디 하나 비빌 데가 없다. 나는 진짜 혼자다’라며 두려워 벌벌 떨었다. 그 시기를 견디고 나니, 조금은 내 땅이 생겼나 보다. 이 정도까지 보이는 걸 보니 ㅎㅎ 사실 이 그림자를 인지하고 나서도 인정하고 글로 쓰기까지는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혼자 소화가 안 돼서…
타자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고 살던 나는 이제 안전감을 직접 생산해야 하는 위치에 왔다. 그리고 내가 내 위치로 오는 만큼 내 삶에 들어왔던 타자들도 그들의 위치로 돌려보내고 있다. 베프이자 전남편은 그의 위치에 가고, 부모는 떨어뜨려 그의 위치로 보낸다. 이렇게 나는 누구의 욕망이고 시선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바로 서려고 하고 있다.
권력은 나의 안전감의 대체물이었으며,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것은 근원적 취약성이었다. 나는 이 취약성과 함께 가며 내 욕망을 탐구중이다. 나는 이것들을 해부하며 더 깊이 깊이 가고 싶다. 그 끝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