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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달한커피 Aug 23. 2019

갈치속젓과 반바지

 유난히 힘든 날이 있다. 회사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과장의 지적은 오로지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은 자격지심이 들었다. 동료들은 쉽게 해결하고 넘어가는데 나는 한고비 넘으면 또 돌덩이가 가로 막혀 있는 듯 느껴졌다. 요새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여름의 무더위는 절정을 맞아 기온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데 주위의 환경은 더 덥고 열나게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하루 종일 내려 쬐던 열기가 식지 않은 아스팔트를 걷는데 잠깐이지만 땀이 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데 대문고리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핸드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퇴근 했니? 갈치속젓과 반바지 대문에 걸어 놨다. 같이 일하는 직원의 고향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갈치속젓이래. 먹어 봐. 반바지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샀는데 좀 안 맞아. 너한테 맞을 것 같아. 입어’

  순간 울컥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눈앞에 뿌옇게 되면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두 번이나 잘못 입력하면서 혼자서 괜히 볼멘소리를 냈다.  

 ‘지가 내 엄마도 아니면서 자꾸 엄마 흉내를 내고 있어’

 

 며칠 전 언니를 만나 투정을 부렸다. 남편의 회사 사정이 안 좋아 이번 달 삼십일 중 십삼일 밖에 출근하지 않아 월급이 많이 줄었다는 얘기, 어머님 요양병원비 내기도 벅차다는 얘기, 이번에는 날도 더운데 지방에서 시댁친척들이 일곱명이나 올라와 이틀 동안 끼니마다 밥하느라 힘들었다는 얘기. 맞벌이하면서 힘들다는 얘기 등을 털어 놓았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는데 좋은 모습보다는 힘들고 울적한 얘기만 한 것 같아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었다.

 그런데 이틀 뒤 얼굴도 보지 않고 이런 것 들을 걸어놓았으니 ‘괜히 너무 힘든 얘기만 했나. 걱정하느라 잠도 못 잔거 아냐? 갈치속젓은 생전 먹어보지도 않았는데 왜 주는 거야. 젓갈은 식구들이 좋아하지도 않는데. 예전부터 눈썰미 좋아 인터넷 쇼핑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맞는 옷 쏙쏙 잘 사는거 아는데. 딱 보니 반바지는 나를 위해 샀구만...’ 고맙다는 생각보다 불만섞인 소리가 먼저 나왔다.

 

 결혼을 하고 어머님과 시동생과 같이 살았다. 바로 임신을 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살림을 했다. 이십몇년동안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만났으니 얼마나 다르고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던지. 사랑하는 남편의 가족이라고 해도 하루종일 같이 있으니 부딪치는 일 투성이었다. 그러다 가끔 친정 엄마를 만나면 봇물터지 듯 불만을 털어놓았다. 오랜만에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무슨 얘기를 하든지 말이 새어나갈 걱정도 없는, 무조건 내 편이라는 안도감이 들었었다. 친정엄마는 특별한 위로도, 같이 흉을 보는 일도 없었다. 그냥 묵묵히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주며 들어주기만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낡은 빌라 3층 문고리에는 과일, 고기, 반찬 등이 걸려 있었다. 사돈이 있는 집에 선뜻 들어오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걸어 놓고 돌아서는 친정엄마의 발걸음에 어떤 소망과 기도가 들어있을지 생각하면서 그때마다 울컥했었다.


 친정부모님이 돌아가신지 십오년이 넘었는데 이제는 언니가 내 곁에서 친정엄마 역할을 하고 있다. 오지랖이 넓은 건지, 어릴때부터 들었던 장녀라는 역할에 세뇌 당했는지 가끔 이런 일들로 동생들을 감동시킨다. 따지고 보면 언니도 우리보다 몇 살 많지도 않은 나이인데도 말이다. 갈치속젓을 판매한다는 직원의 말에 요즘 힘들다는 동생을 먼저 떠올리며,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동생의 반바지를 고르는, 비닐봉지를 대문고리에 걸고 돌아서는 언니를 생각한다. 오래전 친정엄마의 발걸음보다 더 큰 걱정과 소원이 들어있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봄에 잡은 갈치의 싱싱한 내장을 꺼내 소금에 절여 여름까지 숙성시켰다는 갈치속젓을 조금 덜었다. 청양고추와 마늘, 다진 파, 고춧가루를 넣고 조물조물 무쳤다. 양배추를 살짝 찌고, 알배기 쌈 배추를 곁들여 저녁 밥상에 올렸다. 퇴근한 남편에게 하얀 쌀밥에 갈치속젓을 올려 크게 쌈을 싸주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갈치속젓 얘기는 다음에 들려줄게. 지금은 그냥 맛있게 먹기나 해”

 내일 출근할때는 반바지를 입고 가야겠다. 무릎까지 오는 길이에 통이 넓어 바람이 잘 통하는 반바지 덕분에 올해 기록적인 더위를 잘 견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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