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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달한커피 Aug 23. 2019

속옷, 사치와 궁상사이에서

자수가 놓인 속옷은 역시 예뻤다




 “이 레이스를 좀 보세요. 한 땀 한 땀 수가 놓여져 있어서 우아하고 아름답죠. 만지면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입는 순간...”

휴일에 집안 일을 모두 마치고 커피를 들고 쇼파에 앉아 TV를 켰다. 재방송하는 막장 드라마와 연예인들 나와 신변잡기 늘어 놓는 예능 프로그램을 돌려 보다가 홈쇼핑 채널에서 멈칫했다.

홈쇼핑에서는 속옷을 팔고 있었다. 쇼호스트는 붉은 장미색의 속옷을 들고는 계속 ‘우아하다. 아름답다. 고급스럽다. 안 입은 듯 편하다. 라인을 살려준다. 이 가격에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다’라고 반복하며 강조했다. 평소라면 홈쇼핑의 상술이라며 채널을 돌렸겠지만 이번엔 화려한 꽃 무늬 레이스를 뚫어지게 쳐다 봤다.



얼마전 직장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나눈 대화가 생각이 나서였다.

“나 월급날 백화점에서 속옷 샀어. 나이가 들수록 속옷을 잘 갖춰 입어야 해. 속옷은 비싸면 그 값어치를 하더라”

“결혼기념일 남편이 무슨 선물 갖고 싶냐고 하길래 속옷 사달라고 했어. 수입제품인데 촉감이 달라”

서로 밥알을 튀어 가며 자신의 속옷을 예찬할 때 난 밥만 묵묵히 먹었다. ‘오늘따라 오이 무침이 왜 이렇게 맛이 없는 거야’며 속으로 투덜댔다. 물이 많이 생겨서 양념은 씻겨 내려가 여름에 먹는 오이 무침이 주는 새콤 달콤함을 느낄 수 없어진 밑반찬은 외면을 받고 있었다. 꼭 속옷 찬양에 끼지 못하는 자신이 손님들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반찬의 신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한탄이 섞였다.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이 어떤가 생각했다. 몇 년전 대형 할인마트에서 5개 셋트를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산 팬티를 입었다. 면 재질의 큼지막한 팬티는 자잘한 꽃 무늬가 염색되어 있는 아주 평범하고 시장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편한 속옷이었다. 위의 브래지어 또한 시장에서 식구들의 양말을 사러 들어갔다가 싸게 팔길래 별 고민 없이 집어든 흰색, 하늘색, 회색 3개 셋트 중 하나였다.



그동안 속옷은 내게 백퍼센트 오직 실용면에서 챙겨입는 겉옷 안의 부속이었다. 싸고 편하고 튀지 않으며 때로는 보온의 역할도 해주는 말 그대로 그냥 속안에 입는 옷이었다. 오래 입어 헤어지고 닳아 구멍이 날때까지 입고, 위의 브래지어는 늘어나는 끈을 줄이고 조여 아주 오래 오래 입고 그걸 불편해 하거나 궁상맞다고 생각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특별히 절약정신이 투철한게 아니었고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다. 속옷에 신경을 쓰느니 식구들 반찬에 더 신경을 쓰고, 겉옷을 하나 사고 말지 하는 생각이었다.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다. 아니 이제야 내가 신경을 쓰게 되었는지 몰라도 속옷을 겉옷만큼이나 갖춰 입고 신경쓰는 경우를 많이 본다. 꼭 셋트로 맞춰 입고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움과 또 하나의 패션이라고 생각했다.

쇼호스트는 연신 나풀거리는 레이스와 은은하게 수 놓아진 꽃 무늬 자수를 만지작 대며 ‘입으면 자신감이 붙는다’는 말과 함께 ‘단 1분이 남았다’고 소리를 높여 유혹을 했다. 난 구매 버튼을 누르고 신용카드를 꺼내 결재를 해버리고 말았다. 이번기회에 장롱속에 있는 낡고 짝이라고는 하나도 맞지 않는 할머니 패션 속옷을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이 오십이 낼모레고 결혼한 지 이십년이 훌쩍 넘어 이제는 속옷 정도는 사치를 부려봐야지 하고 되뇌었다.



물론 그날부터 배달되어 오는 날까지 이틀 동안 후회로 가득했다. ‘십오 만원이 많이 넘는 돈인데 뭐에 홀렸나. 그 돈이면 마늘 한 접에, 남편 휴대폰도 바꿔야 하고, 어머님 병원비도 다달이 들어가는데 보탤 걸’ 하고 한숨을 쉬었다. 배달되어 온 날부터 며칠 동안은 열어 보기도 싫어 한 구석에 쳐 박아 두었다. 남편이 그 박스를 발견하고 물어 볼 때서야 하소연을 하며 며칠간의 고뇌에 대해 털어 놨다.

“고민할 것도 없구만. 그동안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 60년대 스타일의 속옷은 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 하나 사주려고 했는데 잘 했네 잘했어”하며 박스를 뜯어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편 덕에 얼떨결에 개봉을 했다. 큰 맘 먹고 샀을 아내가 돈 타령이나 하니 괜찮다고 그럴 자격 충분하다고 해주는 말이 오늘따라 고마웠다.



속옷은 TV에서 볼때보다 예뻤다. 자수는 아파트 담장의 장미보다 아름다웠고, 레이스는 부드러운 촉감이었다. 왠지 모르게 쳐지고 불룩 튀어나온 나잇살도 커버되고 라인도 살려 주는 것 같았다.

오늘은 베이지색 속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속옷을 갖춰 입으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채우는 게 옷뿐만 아니라 마음도 함께여야 한다고 문득 생각했다. 겉으로 번지르 하고 화려하지만 그 이면에 추악하고 검은 속내가 들어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하기 전에 내 속안의 마음도 잘 들여다 보고 단속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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