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10분거리에 황구지천이 있다. 황구지천은 의왕까지 이어지는 천으로 고색동과 오목천동까지 이어지는 3km 벚꽃길이 아름답다. 해마다 벚꽃축제가 열리고 많은 인파가 벚꽃 구경을 하러 올 정도로 명소가 되었다. 황구지천을 끼고 둘레길이 이어지는데 수백그루의 벚꽃이 양쪽으로 만개하면 벚꽃터널이 만들어져 그 사이를 걷기만 해도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황홀하다.
올해만 해도 몇 번이나 방송국에서 나와 이곳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찍어 갔고, 드라마 주인공들이 벚꽃길 아래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 나왔다.
오랫동안 이 동네에 살고 있는데 매년 3월에 꽃봉오리가 맺히면 조바심이 나고 가슴이 뛴다. 봄의 따스한 햇빛을 받으면 조만간 꽃망울을 터뜨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둘씩 터지는 3월말이면 하루가 다르게 이곳 저곳에서 성급하게 팝콘처럼 팡팡 벚꽃이 피어나고 4월이면 꽃잔치가 열린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로 먼 곳으로의 여행을 가지 못하고 매일 황구지천 벚꽃길을 다녔다. 매일 벚꽃 사진을 찍어도 질리지 않았고, 가까이서 보아도 멀리서 바라봐도 꽃대궐이었다.
어느날 바람이 불면 꽃비가 내리고, 꽃비가 황구지천으로 떨어져 꽃보라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꽃이 질때는 바닥이 그야말로 우리가 걷는 길이 꽃길이었다. 그렇게 한달정도가 지나고 여느해처럼 나는 그렇게 벚꽃이 완전히 떨어지면서 흥미도 잃었다. 그 화려한 하얀 벚꽃이 만들었던 즐거움과 황홀함이 꽃이 지면서 꽃나무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낮 기온은 27도까지 오른다는 일기예보가 딱 맞았는지 햇빛은 뜨거웠고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났다. 모처럼 황구지천 둘레길을 찾았다. 별 기대 없이 들어선 길에는 초록빛이 가득한 벚나무가 나를 반겼다. 꽃이 지고 난 5월에 푸르름이 처음엔 낯설었다. 꽃이 떨어지고 한달만에 이렇게 푸른 빛을 낼 수 있었나 할 정도로 잎이 무성한 나무가 되어 있었다. 꽃이 떨어져도 나무는 풍성한 나뭇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조금전까지 뜨겁던 태양을 가려주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벚꽃이 피었다가 지고 난 자리마다 버찌가 열렸다. 연한 주홍색의 벚은 빨갛게 변한 것도 있고 검은 색으로 열매 맺은 것도 있다. 초록으로 변해 그늘을 만들며 자신의 열매를 맺으며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 하고 있었다. 아니 나무는 늘 때마다 변하며 시간과 계절에 순응하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인간이 섣부른 판단을 했다.
화려한 시절을 꽃에 비유하고 그 짧은 시간이 찰나처럼 지나가 아쉬워만 했었다. 일년 중 그 한달 남짓한 꽃이 피어있는 시간만이 볼 것도 느낄 것도 많다고 생각했다. 제일 절정의 시절이고 그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지는 일만 남는 거라고 한탄했다. 내년까지, 다시 꽃이 필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하는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어쩜 나무는 꽃이 떨어지고 나서야 진짜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데 말이다.
열매를 맺어 진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며 사진을 찍어 대던 그 계절이 지나고 더 이상 찾아 주지 않고 눈길을 주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에 걸음을 멈추고 바람을 맞았다. 살랑이며 나뭇잎을 흔들거리고, 황구지천은 잔잔한 물결에 조용히 흘러 간다.
변함없어 보이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연을 닮고 싶다. 지나 왔던 이전의 시간이 나에게 전성기가 아니었다. 지금이, 꽃이 지고 난 지금이 오히려 나에게 최고의 계절이다.